( ‘남녀 칠세 부 동석’으로 회귀하는 여성단체들의 낙후된 조선시대 성(sexual) 의식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요즘 여성단체들이 TV뉴스에 나와서 하는 짓을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남성들이 허리띠만 고쳐 매어도, 손길만 스쳐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기 자녀가 성희롱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느니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한다느니, 하며 성 추행범으로 몰아 부치는 성 혐오증 주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덩달아서 자녀들도 걸핏하면 성희롱이나 성 추행범으로 남성들을 고발한다. 이런 고발 행위가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조선시대의 첩이나 기생들도 양반계급을 성희롱이나 성폭력으로 고발할 지경에 까지 이르겠다는 염려가 된다. 한마디로 자녀들을 그렇게 키우면 장래에 정상적인 남녀인간관계를 맺기 어렵다. 그렇다고 사회적 관습에 어긋나는 남성들의 성행위를 옹호하려는 것은 분명이 아니다. 필자는 이런 여자들의 목소리 높은 주장을 보고 들으니 세상에 참 무서운 여자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욕구 중에서 가장 먼저 만족시켜야 하는 기본적 욕구가 생리적 욕구인 숨쉬고, 먹고, 자고, 입는 것 등이다. 사람이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것, 때마다 화장실에 가는 것, 그리고 성(sexual)적 욕구 등인데, 이런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인간의 모든 활동에 심각한 장애를 발생시킨다. 이런 욕구를 인위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 단체들이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성(sexual)욕구를 죄악시 하는 방향으로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는 점이다. 성(sexual)은 죄악이 아니다. 지금 현재 우리사회는 성(sexual)문제로 시끄럽다. 여성단체들이 성폭력과 성추행 등 성(sexual)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문제점을 사회이슈화 시키더니 작금에는 모든 남자들을 거의 성폭행 범죄인 수준까지 몰아가고 있다. 그런다고 성(sexual)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다. 성(sexual)은 개인의 결정권도 중요하지만 국가나 사회가 너무 깊게 개입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이다. 성(sexual)은 종족번식과 성 욕구의 만족을 위한 매우 자연적인 현상이다. 이것을 멀리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는 사회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성 불감증이나 성 혐오증 국가도 아니며 수도승의 국가도 아니다. 여자들의 옷깃만 스치고 여자들을 잘못쳐다만 봐도 불쾌함을 느꼈다면 성희롱 죄인이 되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니 웃기는 일이 아닌가?

 이런 성(sexual)인식이라면 남녀관계의 불신과 단절을 의미한다. 남자들을 여성 성(sexual)만족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여성들이 성(sexual)을 필요로 하거나 원하면 섹스가 가능하고 여자가 싫어하면 성 폭행 죄인이 되니 부부관계에도 아내의 허락을 받아야 성행위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쩌다가 우리사회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의 성적욕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 정답을 여성들은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첨단적이고 지능적인 성범죄가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간접적인 성(sexual)만족을 위한 성(sexual)기구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리얼돌(남성들의 성(sexual)적 욕구를 스스로 해소하기 위한 여자인형)’과 ‘딜도(여성들의 성(sexual)적 욕구를 스스로 해소하기 위한 남성 성기모양)’이다. 그러나 여성단체들은 이것마저도 극렬히 거부하고 있는 현실이니 그것의 결과는 남성들의 성폭행을 간접적으로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성(sexual)에 대한 논의는 매우 예민한 사회적 문제라서 함부로 의견을 말하기기 대단히 어렵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와 그에 대한 진보적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성(sexual)에 대해 말을 아끼고 쉬쉬한다고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성(sexual)이 나쁘다.’ 라는 잘못된 인식이 보편화 되어서도 안 되며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성(sexual)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영역이며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폭력(sexual violence)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이 접근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주 첨단적으로 성폭력문제가 진화하고 있다.
 우리사회는 성폭력 문제를 결과에 의한 처벌형식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그건 땜질식 방법이다. 그런 방법은 국민들 심성에 성 혐오감만 부추겨서 대인관계와 잘못된 성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자연적인 성행동을 그 자체만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건 천부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대부분 자연스러워야 할 성문제를 금욕 위주로 왜곡되게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다. 성(sexual) 하면 ‘부끄럽다, 숨기고 싶다,’ 라는 생각보다는 어른과 아이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소통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문제는 억압할수록 더욱 심각하게 일어난다. 성적 욕구를 억제시키면서 성문제를 남녀의 기계적 결합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사람은 감정과 느낌이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주부들이 자녀들에게 성(sexual)을 나쁜 것으로 인식시키는 언행도 중단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성폭행이나 성 추행문제의 기준은 대부분 여자들에게 있다. 똑 같이 손을 잡아도 여자들이 기분 나쁘면 성추행이요. 여자들이 기분 나쁘지 않는다면 성추행이 아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부부끼리 섹스를 해도 여자가 조금이라도 싫다면 성폭행이요. 그렇지 않다면 사랑 행위이다. 정말 웃기는 논리 아닌가? 남자가 여자의 성을 만족시켜주는 기구로 전락된 것이다. 요즈음은 남성들이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 남자들이 어떤 행동만 취하여도 혹시나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예민하게 관찰한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사이를 불신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남자가 성적으로 혐오감을 일으키는 동물이라면 굳이 여자들이 결혼하여 남자들과 성 욕구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성 혐오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질적으로 집착하는 여인들에게 묻고 싶다. 성(sexual)은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일부 여성단체 주부들이 젊은 청소년에게 ‘성(sexual)은 나쁘다.’라는 인식을 간접적으로 심어주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남녀 7세 부동석이 아니라 아예 남녀 부동 석을 조장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독신 남자들과 여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성 접촉으로 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을 원천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문제라는 것이다. 아마 성 불감증 환자이거나 성 혐오감 환자임이 분명하다. 일반 동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남자들의 옷깃만 스쳐도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성 추행범으로 몰려고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성 불감증 여성들의 그런 행위는, 중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싶다. 잘못쳐다만 봐도, 말 한마디 잘못 붙여도 성희롱이요. 몸이 부딪쳐도 성 추행범으로 마녀사냥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다. 과도한 성 피해의식과 남자를 잠재적 성폭행 범인으로 바라보는 성 혐오증 여자들의 시선은 이제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런 현상은 심각한 사회적 후유증을 남긴다. 어린 여학생들의 남성에 대한 혐오감과 불신감만 증폭시켜서 남녀관계에 단절의 영향을 미치며 가정불화의 기초를 제공한다.

 조선시대의 성교육은 억압적 규범으로 점철된 ‘성교 예방 교육’이었다. 도덕적 관념으로 욕망을 제거한다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 욕구마저 부정했다.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서 조차 성(sexual)을 금기시했다는 점이다. 부부 사이라도 가급적 서로를 멀리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남녀의 접촉을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남녀를 떼어놓기만 하면 모든 성(sexual)적문제가 해결된다는 단순무식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여성단체 주부들에게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원래 조선 사회는 부부 이외의 남녀관계를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첩과 기생은 무엇인가. 남성들의 음성적 성적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편법적 제도에 불과하다. 이들은 억압된 성(sexual)적 욕구가 만들어낸 피해자다. 성적 욕구를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조선시대 성교육은 앞에서는 성을 금기시하면서도 뒤로는 성(sexual)에 탐닉하는 이중적인 성문화를 고착화시켰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성(sexual) 관념이 이중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고등학교 성교육 담당교사가 바나나에 콘돔을 씌우는 실습을 하려다가 학부모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여전히 성(sexual)교육을 성교 예방 교육으로 착각하는 주부들이 많은 모양이다. 바나나에 콘돔을 씌우는 행위가 혐오스럽게 느껴진다면, 조선시대의 도덕관념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학부모의 의견은 귀담아들어야겠지만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막을 수 있을 때까지 막아보겠다는 식의 성교 금지교육은 조선시대와 다를 것이 없다. 어째서 성(sexual)교육만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우리 어른들의 성(sexual) 관념이 조선시대처럼 여전히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우리 아이들은 학생이기 전에 육체와 기본적 욕구를 지닌 인간이다. 이 점을 외면하면 정확하고 올바른 성교육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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