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이익과 탐욕에만 눈이 불타는 사람들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개보다 못한 사람이란 말은, 사람 사이의 신의를 헌 신짝처럼 저버리거나, 부모를 섬기지 못하고 천대하는 사람이거나,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개에 빗대서 하는 말이다.
 요즘 이런 사람들이 지천에 깔려있고 폭발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는 현실이다. 살기 힘들어서 그럴까? 아니면 하루살이 인생이 돈 좀 벌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럴까? 쥐꼬리만 한 권력 잡았다고 목에 힘이 들어가서 그럴까?
 개는 타인의 외모를 탓하지 않으며 내가 돈을 어떻게 버는지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 개는 처음 만난 주인이 자신을 신뢰해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무조건 맡겨버린다. 재산이 많은지, 장애가 있는지, 미남미녀인지, 권력자인지,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한 번 주인을 정하면 그 개는 주인이 먼저 떠나지 않는 한 한평생 주인 곁에 앉아 주인만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애정을 쏟아낸다. 꼭 주인이 특별한 무엇을 해 주어서가 아니라. 같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한다. 내가 만일 일이 잘 안 풀려 단칸방으로 이사를 간다고 해도, 직장을 잃어 노숙자가 된다고 해도 개는 나와 함께하는 것만으로 행복해 한다. 그런데 요즘 주부들을 살펴보면 남녀평등인가 뭔가 주장하고 다니더니 여성해방이라도 된 듯이 목에 힘을 주고는 남편을 헌 신짝 버리고는 이혼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을 옆에 두고 개보다 못하다는 말은 참으로 치욕적이다. 물론 이것은 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 대부분이 개만도 못한 세상에서 개를 비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다. 개보다 못하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개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사람이 개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전제가 바탕이 되어있다. 하지만 사람과 동물의 구분이 능력만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께 불효했을 때 사람들은 개보다 못한 놈이라고 한다. 즉 효도는 짐승조차 지키는 가치라는 것이다. 욕구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말한다. 즉 사람은 동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지만 동시에 도덕적으로도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적 인간은 그런가? 우리는 인간적 혹은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우리는 타인을 따뜻하게 돕는 사람을 보고 인간적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사람을 보고는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인간적이라고 할 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개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개는 순수하게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니 정작 사람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동물은 상황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리하게 변하면, 상대가 자신과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말도 헌 신짝처럼 버린다. 사회가 이렇게 만든 것일까? 치열한 경쟁,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면 서로의 비교를 통해서 사람의 능력을 우선적으로 중요시할게 아니라 사람으로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사람으로서 어떤 것이 중요시 되어야 하는지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변해야 한다.

 오늘도 멍! 멍! 멍! 고층 아파트 위층 집에서 가끔씩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높은 곳에서 짖으니 마치 앰프방송처럼 온 동네에 쩡쩡 울린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위를 쳐다보니 조그만 개가 세상사람 모두 들으라고 밖을 향해 짖는다. 때로는 앙살스럽게 깽깽거리며 짖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게 뭔 소린지 모른다. “아이! 시끄러워. 개는 왜 키워?”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자기보다 못한 짓을 하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짓는 소리다. “나 보다 못한 인간들아! 너희들 하는 짓을 보니 너희들 목에 개 목걸이를 달아서 대문 칸에 묶어두고 집을 지키도록 해야겠다. 우리들은 자유롭게 안방을 차지하고 개 같은 삶을 살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래도 개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되겠는가? 우리는 항상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 되어져야 한다. 자신의 삶은 자신만이 안다. 자신의 입을 위해서 먹이만 찾아서 떠도는 삶인가? 아니면 인간답게 사는 인정이 넘치는 생각 있는 삶인가? 개가 이 시대에  인간에게 울부짖으며 짖어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개보다 못한 짓이 무엇인지도 찾아보자. 자신의 이익과 탐욕에 너무 집착하고 몰두한 사람을 향해 일반적으로 ‘돈에 환장한 사람’ 혹은 ‘욕심에 눈빛이 뒤집어진 사람’ 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다 보면 사리분별이 안되고 판단력이 흐려져서 눈빛마저도 달리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자신은 모른다. 눈이 뒤집어지면 누가 뭐래도 타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집착하여 추구하는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될 때에야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듯이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습관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치 배고픈 개 한 마리가 뼈다귀 하나를 먹기 위해 서로 어르렁거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주제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가족전체가 이사 갈 때는 마누라가 기르던 애완견은 데리고 가지만 늙은 남편은 챙기지 않고 버리고 가니, 나이 들면 마누라가 어디 가는지 항상 살피라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마누라가 좋아하는 가족 중의 우선순위는 늙은 남편보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의 중요도가 훨씬 높다고 한다. 늙은 남편이 얼마나 값어치가 없고 간접적으로 소외와 냉대를 받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평생 동안 가족 먹여 살린다고 허리가 휘고 건강이 말이 아니지만 나이 들면 불필요한 폐품 취급을 받는다는 현실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누라의 대화의 목록에서 늙은 남편은 제외되며 관심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늙은 남편은 마누라의 생활에 깊이 간여하지 말고 매사에 조심하며 항상 마누라의 동정을 살펴야 하는 불쌍한 인간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니 가정의 모든 일을 마누라에게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나이 들어도 독자생존 할 수 있는 준비를 젊을 때부터 대비할 필요가 있다. 요즘에는 대부분 집에서 개를 기른다. 물론 토종개도 있지만 대부분 애완견이다. 말이 애완견이지 사실은 로봇이나 살아있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애완견이 자신에게 끝없이 순종하며 사랑스런 행동만을 하기를 요구한다. 주인은 애완견에게 불만을 표현할 기회는 좀처럼 주지 않으며 그들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인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며 순종하고 희생과 봉사만을 강요한다. 그런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화해야 하는 애완견의 삶이 처량하다. 그  물론 개와 사람을 비교한다고 해서 사람의 존엄성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사회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애완견도 생명체이므로 생명의 소중함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그들이 비록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는 없지만 그들만의 언어로 인간에게 날마다 그들의 감정을 전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옛날에는 시골마을에 저녁때가 되면 동네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찌 들으면 개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을 온 천하에 알리는 외침의 목소리 인지도 모른다. 개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인간과 함께 동거해왔다. 그리고 진화해 왔기 때문에 인간의 습성을 잘 안다. 그러므로 인간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런 결과 인간에게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인간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선물한다. 주인을 맞이하는 개는 반가움의 표시로 꼬리를 치며 자신의 혀로 주인의 온 몸을 핥는다. 비록 인간이 먹다 버린 음식찌꺼기를 먹고 살지만 그래도 인간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으로 은혜를 갚는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도 아끼지 않는다. 개는 무척 고마운 동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개를 잡아먹었으니 인간이 개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들은 화가 나면 ‘개 새끼’ 라고 욕설을 해서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이제는 개가 사람을 향해 ‘사람새끼’라고 욕설을 해야 할 판이다. 개보다 못한 인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졸부들이다. 미국의 한 노인이 자기가 기르던 강아지에게 1,560억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는 뉴스가 있다. 그리고 강아지를 사육하는 사육사에게 1년에 5천만 원의 연봉을 주겠다고 유언했다. 개가 죽으면 남은 돈을 동물보호소에 기증하도록 했다. 그런데 자신의 외동아들에게는 10억 원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러니 아들이 “도대체 어떻게 내가 개보다 못합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판사님, 억울합니다. 바로잡아 주세요.” 라며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제기했다. 그 젊은이에게 판사가 물었다. 젊은이, 1년에 몇 번이나 아버지를 찾아뵈었는가? 아버지가 즐겨 드시는 음식을 아는가?“ 젊은이는 한 마디도 대답을 못했다. 그때에 판사가 젊은이에게 천원을 상속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하기야 요즘에는 부모의 유산을 놓고 자녀들 끼리 법정까지 가는 싸움을 한다든지 혹은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엉뚱한 짓을 하는 자녀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정녕 사람이 개보다 못하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참담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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