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칼럼니스트
 "뗄래야 뗄 수 없는 언어로는 한국어는 기본이자 완벽함이고, 영어와 한문이다. 이러한 3개 국어가 필수이나 아둔한 편이다. 또한 속 빈 강정 모양 한국의 삶이 질이 개판이라, 지인의 권유와 요청도 있어 이민에 대비한 상대국 언어를 익혀야 할 상황에 처해있다. 늦깎이 학위과정에서는 원어민과 똑 같은 수업으로 인한 영어 때문에 코피가 터지고 입까지 망가진 적이 있다. 한문도 속된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골 때린다. 한자는 읽는데 있어 거의 모르는 게 없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우리 고전을 번역할 때는 바보가 된다. 다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문사인 내게도 한국어가 100% 완벽하지가 않기에 늘 부끄럽다. 얼추 1~2% 부족에다 상대방에 대한 존칭어에 대해서는 매번 헷갈린다. 문장을 완성했을 때 즉, 탈고 시 통상 0.1~0.5% 정도 오류가 발생한다. 여기서 작은 문제가 또 발생할 때가 있다. 내 원고나 기고문이 완벽하다는 선입견에 상대측은 교정을 아예 안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10여 년 전에 간간히 쓴 글을 책으로 묶어 출간하려고 수정 중에 있다. 문법과 더불어 탈고가 무엇보다 어렵다. 독자들은 내 오류를 좀처럼 발견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어쩌면 당연하다. 수십 년 글을 쓴 내도 완벽하지 못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글쓰기란 쉬운 게 아니다. 아직도 내게는 어려운 숙제다. 그럼에도 뭇 군상들은 쉽게 책을 내는지 아이러니컬하다. 물론 그들의 책에서 독자들이 간과할 수 있는 엄청난 오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내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설파하니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안다는 게 멋진 사람이다." "99% 실력에서 한계점을 스스로 정리하는 모습이 부럽다" 는 답변이다. 언어의 익힘과 글쓰기는 어렵고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여기서 자신들은 쓰지도 못하면서 문사에게 껌 씹듯이 비아냥거리는 허접하면서 대가리 텅 빈 부정의한 족속들의 심장에는 과감하게 정의의 화살을 쏜다. 이게 비평가의 본질이자 사명,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바로미터가 아닐까. 10년 전 서울시민을 위한 법률상담요원으로 참가 시 느낀 소회를 꺼내려다가 짧은 글 두 테마를 옮긴다.


 세상은 그렇게 넉넉한가?

 방금 퇴근하려고 채비를 갖추고 있을 때였다. 건장한 청년이 모자를 눌러쓴 채 들어온다. "사장님, 뭐 부탁하려 왔습니다."
"어떤 일이죠? 처음 뵙는 분 같은 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돈 좀 달라는 것이었다. 젊은 몸꼴에 근로능력이 있는 자로 비춰졌기에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대꾸가 없자 "그러면 1,000원만 달라" 는 것이었다. 별의별 잡상인도 들끓지만 그들의 생존권을 짓밟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이 제의에도 여의치 않자 "큰집(?)에서 나왔는데..." 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자신의 요구가 먹혀들지 않자 바로 협박이었다. 여기서 내 건장한 체구와 의협심이 20대 이상으로 찌를 듯 했다. 내 성격을 아는 직원들은 숨죽이고 있었다. 용서가 되지 않는 순간을 맞이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 친구, 조용히 나가게. 얻어맞지 않으려면."
이때는 예의가 상존할 수 없는 터라, 기세당당하게 몰아치니 어느 정도 반항하다가
항복(?)을 하고는 "잘못되었다" 면서 나갔다. 그 자로서는 임자 잘못 만난 셈이다.

사원을 채용할 때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면접심사를 받으려오는 이에게도 그날 일당을 지급한다. 그렇게 혼자 먹으려는 사고와는 멀다. 지하철 등에서 적선을 꽤 하는 편이다. 그리고 무슨 연유인지 이러한 분들은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유독 필자에게 곧잘 구걸을 한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로 보이는 모양이다.
봉사하는 기관에서 받는 아주 경미한 수당을 받는데, 이조차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자동 입금되게끔 해놓았다. 한번은 이 돈을 연말 정산하니 고졸 초임에 육박하는 돈이었다. 이러한 불우이웃돕기는 하여도, 이러한 젊은이에게는 그 협박에도 한 푼도 내놓지 않는다. 아무리 불황이라 하여도 소주 마실 돈은 있어도, 컵라면 하나 먹을 수 없는 근로의 의욕을 상실한 자에게는 베풀고 싶지 않은 늦은 오후였다. -2005.2.2-


 자린고비 영감

 세수 60중반인 자린고비 노인이 내 사업체 주변에 산다. 나름 나를 좋아한다. 그러나 피곤할 때가 많은 건 사실이다. 거의 20년 연상이다. 그는 20년 전 부인과 이혼하고 계속하여 혼자 살고 있다. 짐작컨대, 성격불일치로 이혼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전처의 자식도 셋이나 있다. 그는 돈도 꽤 있다. 그러나 돈은 쓰지 않는다. 재혼을 하려해도 돈이 아까워 혼자이다.

 가끔 장난기 넘치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한 번은 나를 찾아와서는 장가를 가겠단다. 애를 하나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처에게 있는 애 셋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애를 낳아주면 호강시켜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돈은 줄 수 없다. 그것은 장사 속이기에 원치 않는다." 고 한다. 단, 자기 사후에는 가지고 가라는 것이다. 자기를 벗어나 누구든 사기꾼으로 보인단다. 일종의 결백증 환자인 셈이다. "이민을 가려해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못 간다. 중국의 진시황도 36세밖에 살지 못했다. 이는 많은 여자를 거느린 끝에 조기 사망하였기에, 생리적 욕구도 여태까지 참는다." 는 논리치고는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자기만의 멋인지 모르겠다. 인간들은 돈에 애착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올바르게 사용할 줄도 아는 지혜가 부족해 보인다. 언젠가는 버리고 갈 그놈의 돈이다. 200억대 재산가인 일흔 대 또 다른 노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지난해 불우이웃성금으로 얼마나 냈냐?" 대답이 걸작이다. 자기 아들이 실업자라서 자기도 불우이웃이란다. 그래서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들은 명문대학에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30대말의 건장한 청년이다. 이 정도로 우리나라의 기부문화는 척박하다. 그러면서 이들은 덜 가진 자들의 노력의 대가 위에서 임대료를 받아먹고 산다.

 함께 더불어 사는 삶에, 너무나도 인색한 두 노인과의 대화에서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하루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기부문화가 형성되는 국가적, 사회적 뒷받침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함께 나누는 삶도 멋의 한편이 아닐까 싶다. 가지면 더 가져야만 되는 모양이다. 탐욕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이승을 떠난 삼도천의 문턱인가? 우리들의 슬픈 인생은 곧 종착역에 도달하는데 예외가 없다. 부는 이승을 떠날 때 가지고는 가지 못한다. "아들이 실업자라서 자신도 불우이웃이다." 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긴 그 영감님과 오늘을 떠나 내일도 건물 임대인과 임차인으로서 얼굴을 맞댄다.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에 오늘 해도 기운다. -2005.2.7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