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 호 참사를 겪은 엄마들의 마음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남의 죽음이 나의 감기보다 못하다.’는 옛말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들에게는 이웃의 슬픔에 마음 아파하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말이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 하는 것도 비인간적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과의 거래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에는 조금의 인간적 배려도 없이 비정하다. 죽는 사람은 모든 세상살이에 대해 입을 다물어버리기 때문이다. 죽는 사람 옆에 두고 아내는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해야 하고 자녀는 친구들과 폰팅을 하며 해외여행을 떠나야 하는 현실이지만 말이다. “엄마, 엄마 나 죽거든 앞산에 묻지 말고. 뒷산에도 묻지 말고 양지쪽에 묻어 주. 비오면 덮어주고 눈 오면 쓸어 주. 내 친구가 날 찾거든 엄마, 엄마 울지 마! 엄마, 엄마 우리엄마 나 떠나면 설워마! 음지에다 묻지 말고 양지에다 묻어 주! 봄이 오면 꽃잎 따서, 가을 오면 단풍 따서, 무덤가에 뿌려주고 내 손 한번 잡아 주! 아가, 아가 우리 아가 부디부디 잘 가라. 고통 없는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거라.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어디에서 머물꼬. 좋은 세상 만나거든 다시 태어 나거라!” 위 구절은 “엄마, 엄마 울지 마.” 라는 전래동요풍의 노래 가사 말이다. 미국의 ‘클레멘타인’ 곡(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에 가사를 덧붙여 부르는 슬프고 애달픈 노랫말이다. 어린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엄마가 쓴 편지글에 그 자녀가 답 글의 형식을 보태서 만든 노래이다. 독자들도 한 번 따라 불러보기 바란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세월 호 참사를 기억하며 그 참사에 의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엄마들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한다. 세월이 아무리 흐른들 엄마들의 가슴에 자녀를 묻고 사는 그 가슴은 켜켜이 상처가 쌓여만 가리니 그 속 쓰림을 누가 아랴! 더불어 자녀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전래동요의 ‘찔레꽃’ 노래가사이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도 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 엄마 찾으며 날아갑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시골집 뒷산길이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나오면, 마루에 혼자 나가 별을 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이렇게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간절한 정으로 맺어져 있다.

 꽃다운 나이 17-8세의 300여명의 남녀 학생들이 산체로 바닷물 속에 수장된 비극적인 사건이 세월 호 사건이다.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꽃봉오리 마냥 시들어버린 어린 자녀들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안타깝게 죽어가는 그 순간을 보면서, 그 장면들은 엄마들의 가슴에 깊고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찌 엄마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수 있으랴.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 앞에서 부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단지 마르지 않는 눈물을 흘릴 뿐이다. 크게 슬퍼할 수도 없다.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하기도 한다. 다른 자녀들이 있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도 내 책임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과거 그 때 그 말 한마디, 그 때 그 행동 하나하나가 다 나를 공격한다. 그리고 납득되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서 몰려오는 슬픔에 멍한 상태,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그러다 갑자기 슬픔에 눈물 흘리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자녀의 죽음 앞에서 모든 부모들이 보이는 모습이다. 질병이든 사고사이든, 자녀를 잃은 부모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힘든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에게 "다 잊어요."라고 위로하면서 그 슬픔을 가슴 속에 묻게 한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슬픔은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라, 배어 나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함께 손잡고 울어주고, 함께 그의 마음에 공감하면서 '우리가 옆에 있으니 언제든 우세요.'라는 감정이 전달되도록 애도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건으로 한 가족이 해체되지 않도록, 서서히 가족이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예상하지 못한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중 자녀의 죽음은 부모에게 매우 큰 상실감을 주면서 일상생활의 균형을 깨뜨린다. 청소년기 자녀들이 사망하게 되는 주요 원인은 질병이라기보다는 사고에 의한 것이다. 질병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있으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어느 시기가 존재하지만, 사고사의 경우는 너무 돌발적이라 부모는 미칠 지경에 이르게 된다. 부모들은 그 자녀들과 함께한 추억에 시달리고, 성장한 그 자녀들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대감 등도 가지고 있기에 상실감은 사실 어린 자녀를 잃은 경우보다 더 클 수도 있다. 필자는 세월 호 희생자의 추모제를 보면서 서서히 목이 메어오며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세월 호 사고를 통해 세상을 떠난 자녀들의 영정을 놓고 오열하는 남은 가족들의 모습이 너무나 슬퍼 보였던 것이다. 만약 내 자식이 저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해서 저 자리에 내가 서있었더라면--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며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죽음은 두려움이라기보다 슬픔이다. 헤어짐과 잊혀짐, 그리고 결국은 깨끗이 지워짐으로써 애초에 생(生)과 더불어 관계 자체가 없어지고 마는 무(無)로의 환원, 이 허무함에 맞서고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주관과 신념을 고집해온 것은 아닐는지, 그러니 있을 때 잘하고 사이좋게 지낼 것이지 뭐 잘 낫다고 그렇게 콧대 세우며 미워하고 사느냐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어차피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네 후손이나 내 후손도 죽고, 대대손손 움켜쥐어보았자 결국 무덤만 남을 텐데, 구약성서에도 자식 잃은 부모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욥’이라는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상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중에 그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하루사이에 모든 가축과 종들을 잃고, 누군지도 모를,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약탈자에 의해서 다 죽는다. 게다가 큰 바람으로 건물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자녀들이 다 죽게 된다. 몰살한 것이다.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 전해진 이 비보에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욥’은 이성을 잃지 않고 그전까지의 그의 모습 그대로의 자신의 삶을 지켜나간다. 그리고 그를 위로하러 온 세 친구들은 욥이 당한 무수한 고통에 뭐라 할 말을 잃는다. ‘욥’은 너무나 괴로워서 소리 지르며 자신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리고 머리에 뿌리면서 함께 고통스러워할 뿐이었다. 7일 밤낮을 ‘욥’과 함께 했지만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욥을 향해 친구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욥이 스스로의 고통에 괴로워하며 상한 마음을 토로하는 순간, 친구들의 그 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다 하려는 듯 엄청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녀를 잃은 부모가 듣기 가장 고통스러운 말들을 욥의 친구들이 내뱉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이었다. ​자녀의 죽음으로 가장 괴로워할 ‘욥’에게 하는 이런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며,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은 누구의 잘잘못을 가릴 때가 아니라, 세월 호 엄마들을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새 힘을 얻도록 도와야 할 순간이다. 이때만큼은 아무런 말없이 옆에서 손을 잡아 주며 어깨를 또닥여주고 하는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자녀가 죽을 때 부모는 가장 큰 슬픔을 경험한다. 동물도 새끼가 죽었을 때 가장 슬퍼한다.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이다. 슬픔이나 상실은 어른뿐만 아니라 아주 어린 아이들도 겪을 수 있는 감정이다.

 어른들은 흔히 아이들이 상실을 겪은 후 어떠한 고통을 겪을지에 대해 과소평가하거나 간과하곤 한다. 몇 년 전 세월 호 사건을 겪으면서 부모님들 대부분이 함께 아파했던 경험이 떠오르실 것이다. 세월 호 사건은 우리 전 국민에게, 특히 그만한 또래의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는 더 생생한 아픔으로 다가왔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당시 부모님들은 물론 청소년들까지도 마음 아파했지만 슬픔과 상실의 경험은 어른들만 겪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어린 자녀들은 슬픔과 상실을 어른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가령, 잠을 잘 자지 않거나,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등으로 자신의 슬픔이나 상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연령에 상관없이 슬픔이나 상실은 누구나 경험하며 표현되어진다는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자녀에게 관심을 두고 보살펴주기 위해서는 자녀의 슬픔이나 상실에도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 자녀가 ‘학교에서 있었던 속상했던 일, 슬픔 감정, 전학 간 친구에 대한 원망 등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녀가 겪고 있는 아주 작은 슬픔, 사소한 상실에도 관심을 가져주는 부모, 그리고 그것을 자녀가 표현하도록 따뜻하게 격려해주고 손잡아 주는 부모가 되기를 기대한다. 대체로 부모들은 자녀 앞에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길 주저한다. 상처와 슬픔, 공포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슬픔을 들어주고, 아이들이 알고 싶어 하는 만큼 최대한 솔직하게 답해주어야 한다. 오히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잘 추스르는 방법이다. 자기 자녀가 사랑스러운 만큼 남의 자녀도 사랑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이웃의 슬픔에 대해 너무 몰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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