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오신 날에 ‘반야심경’ 이야기 5편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괴로움이 닥치더라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 곧 즐거움이 올 것이다. 즐거움이 오더라도 너무 즐거워하지 말라. 곧 괴로움이 닥칠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매우 괴로워한 만큼 즐거움은 매우 크며 매우 즐거워한 만큼 괴로움 또한 매우 크다. 매우 괴로울수록 매우 즐겁고 매우 즐거울수록 매우 괴롭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괴로움이 곧 즐거움이며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니 즐거움과 괴로움이 서로 반대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하나이다.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이 마음에서 오는 작용의 현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고 또한 느껴지니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그 실체가 없으니 기쁨과 슬픔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괴로움 또한 마찬가지다. 괴로움이 생성되는 곳도 없으니 또한 소멸되는 길도 없다.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니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항상 잠재워두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마음은 애착이 심하여 잠자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불길처럼 일어나서 허상을 실상처럼 조작하니 그와 동시에 괴로움과 즐거움이 환영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불꽃처럼 일어나는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멈추어라. 그런 마음과 생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동시에 괴로움과 즐거움도 덩달아 불꽃 춤을 추는 것이다. 모두 허깨비놀음에 불과하다. 이런 마음이 당신의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디 한 번 내어놓아 보아라. 없는 마음이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니 마치 허깨비가 춤을 추는 것이라. 당신은 실체가 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꿈을 깨면 꿈속에 나타나 실존처럼 느껴졌던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깨끗이 사라진다. 모든 꿈은 개꿈이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 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 반야바라밀다 (無 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依 般若波羅密多)”

 요약해서 풀이하면) 어리석은 착각으로 가려진 어둠도 없고, 그 어둠이 다함도 없다. 늙고 죽는 것도 없으며, 늙고 죽는 것이 다함도 없다.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도 없고 괴로움의 소멸도 없으며, 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없다. 깨달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지혜로운 구도자는 반야바라밀다(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공(空)에 대한 지혜’ 혹은 공(空)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도달한 열반의 상태 즉 지혜의 완성을 의미)’ 에 의지한다.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내가 있고, 남이 있으며, 객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이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괴로움’을 말할 수 있으며, ‘괴로움의 원인’을 말할 수 있고, ‘괴로움에서 소멸된 상태’를 말하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을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과연 존재하는가? 공(空)의 입장에서는 현상계를 인정할 수 없다. 즉, 현상계의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는 것이다. 현상계에 대한 단순한 겉모습을 살펴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현상계를 지탱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습, 즉, 공상(空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空)에 있어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현상의 일체 세계가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 본래 공(空)하고, 현상의 세계가 모두 공(空)하다면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없으며 또, 괴로움이 없는 마당에 괴로움의 원인과 그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도 없는 것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무 자성:(無 自性), 인연의 가합상(연기:緣起)임을 올바로 알아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것(무 집착:無 執着)을 요구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괴로움[고:苦]이 본래 없다는 것을 올바로 알기에, 괴로움의 원인[집:集]과 소멸[멸:滅]에 이르는 길[도:道]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같은 공(空)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일체의 물질, 정신적인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空)의 입장에서 삶을 조명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일체의 집착에 끌려다니지 않아야한다. 놓고 가는 생활이 필요하다. 놓고 가는 삶, 비우는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일체 애욕과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이유가 된다. 우리가 잡고 있는 일체가 다 공(空)이며 연기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이다. 위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연법의 단계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연법은 무작위로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인간의 본질에 대한무지)-행(行:실재에 대한 잘못된 사고)-식(識:행이 가져오는 인식의 구조)-명색(名色:식의 대상인 자아정체성이 이루어지는 근본 원리)-육입(六入: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과 통합하는 작용)-촉(觸:존재하는 대상과 감각기관의 관계)-수(受:촉(觸)에 의하여 일어나는 감각작용)-애(愛:감각작용을 갈구하는 목마름)-취(取:대상에 대한 애(愛)의 집착)-유(有:취(取)에 의해 형성되는 생성과정)-생(生:유(有)의 결과로 개체탄생)-노사(老死:생(生)의 결과로 늙고 죽음) 이다. 인연법의 단계는 모든 우주만물이 공통적으로 거치는 진리이다. 인연법의 시작은 무명(無明)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의 의미는 진리와 생명의 진실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시작된다. 왜 이런 무지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은 모두 ‘나’를 내세우며 ‘나’중심으로 살지만 그 ‘나’가 본래부터 실체가 없는 무아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명(無明)은 본래부터 비어있는 허공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둠의 혼돈상태이다. 다음은 ‘행(行)’인데 무명으로 인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다. 다음은 식(識)인데 대상이 내 마음속에 비춰지고 있는 상태이다. 다음은 명색(名色)인데 이름과 모양이며 알기 쉽게 말하면 정신과 육체이다. 다음은 육입(六入)인데 주관과 객관인 주체와 대상이 나누어지는 현상이며 구체적으로 눈, 귀, 코, 혀, 몸, 뜻,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을 말한다. 다음은 촉(觸)인데 눈으로 빛깔과 모양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내 뜻으로 대상을 헤아린다. 나에게 맞으면 좋게 느끼고 맞지 않으면 나쁘게 느낀다. 나와 맞지 않으면 무심하게 흘려버린다. 다음은 수(受)인데 접촉에 의한 감수 작용으로 좋게 느낀 것은 즐거워하고 나쁘게 느낀 것은 괴로워하며 평등한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삼지 않는다. 다음으로 애(愛)인데 마음속으로 만들어 낸 즐거움을 향해 갈구하는 목마름을 말한다. 나를 괴롭게 하는 대상에 대한 깊은 증오심이나 분노도 이에 속한다. 다음으로 취(取) 인데 애(愛)로 말미암은 집착을 말하며 갈애에 빠지거나 증오심에 휩싸인 다음 행동으로 옮기기 전 까지 의 마음상태나 갖가지 번뇌 망상을 말한다. 다음으로 유(有) 인데 집착에서 비롯된 업을 말한다. 집착으로 인하여 마음속으로만 키워왔던 생각들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그것이 표면화 되는데 그것을 업(業)이라고도 한다. 이 단계에서 좋고 나쁜 업(業)을 지으며 업에 의해 좋고 나쁜 생을 받게 된다. 다음으로 생(生)인데 업(業)에 의해 태어남을 말한다. 다음으로 노사(老死)인데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생겼으면 사라진다. 업(業)의 과보를 받으며 병들고 늙고 걱정하고 고생하고 슬퍼하고 고뇌하며 살다가 그 과보가 다하면 또 다른 업(業)의 세계를 향해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떠난다. 이런 단계가 누구나 거치는 인간의 삶이다. 무 고집멸도(無 苦集滅道)란 공(空) 가운데에는 무 고집멸도(無 苦集滅道)인 사성제도 역시 그 자성(自性:법(法)의 본질적 성질, 실체를 말하며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는 자기만의 특성이다)이 없다는 뜻이지‘고집멸도(苦集滅道) 자체가 없다.’ 라는 말은 아니다. 오온, 6근, 12처, 18계, 12연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고성제(苦聖諦)와 집성제(集聖諦)의 관계도 역시 연기법(緣起法: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서 생겨남. 또는 줄여서 인과법칙(因果法則) 혹은 인과법(因果法) 또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이다. ‘고통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는다.’ 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인 사성제(四聖諦)에는 연기법(緣起法)이 담겨져 있고, 그 연기법(緣起法)에는 인과와 공(空)이 포함되어져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공(空)을 깨닫고 나면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없다.’ 라는 의미가 된다.

 무지 역 무득 이  무소득고 보리살타 의 반야바라밀다(無知 亦 無得 以 無所得故 菩提薩陀 依 般若波羅密多)는 얻을 봐 없는 까닭으로 제법이 텅 빈 것을 알게 되므로 모든 깨달은 중생들이 반야바라밀다(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공(空)에 대한 지혜’ 혹은 공(空)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도달한 열반의 상태 즉 지혜의 완성을 의미)를 의지해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이란 실체가 없다. 자신의 업식(業識:자신의 행위, 옹고집, 색 안경, 편견 등의 삐뚤어진 생각에 갇혀있거나 사로잡혀 있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을 말한다. ‘내 것이다. 내 소유다. 내 생각이 옳다’ 하는 애착과 집착이 사람을 어리석게 그리고 무지(無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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