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오신 날에 ‘반야심경’ 이야기 4편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세상만물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 변하는 모습은 작용으로 나타나는 순간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며 변하는 속도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그러하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그러니 이것이 ‘내 마음이다.’ 라고 내어 놓을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변하지 않고 고정된 무엇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과 마음도 그렇다.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이게 무엇이다.’ 라고 할 만한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한 생각까지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삶이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공:(空)의 의미이니 그것을 밑바탕에 깔고 생활한다면 이기심과 각종 욕망이 사라지며 그런 결과로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나의 모습을 오랫동안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욕망의 사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존재라는 것이 무엇인가? 마치 안개와 같아서 눈에 보여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세상만물과 마음까지도 그러하다. 인연에 의한 작용만 끊임없이 되풀이 되며 그것이 현상으로 잠시 동안 눈에 비추다 사라질 뿐이다. 마치 번개 불이 번쩍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듯이 말이다. 바로 당신의 존재가 그러하다.

 “사리자, 시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舍利子, 是 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무 수상행식, 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 무 안계, 내지 무 의식계(無 受想行識, 無 眼耳鼻舌身意, 無 色聲香味觸法, 無 眼界, 乃至, 無 意識界)”

 요약해서 풀이하면) 사리불이여! 이처럼 모든 우주의 법칙은 텅 빈 것이며,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 더러운 것이나 깨끗한 것도 없고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도 없다. 그래서 텅 빈 본질세계에는 물질적 형상이 없으며 정신적 요소인 느낌이나 생각, 의지, 인식작용도 없다. 또한 눈과 귀와 코와 혀 그리고 몸은 물론이고 의식조차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과 소리, 냄새, 맛, 몸으로 느끼는 감촉도 없고 의식으로 분별할 대상도 없다. 눈으로 보는 세계도 없고 의식의 세계도 없다.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시 제법공상(是 諸法空相)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사리자여.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으며,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空)이 곧 색(色)이니, 수상행식(受想行識)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空)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는 색(色)이 없고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는 것이다. 제법(諸法)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말하며 공상(公相) 그 자체의 본질은 텅 빈 것을 말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의미는, 몸도 마음도 모든 본질이 텅 비어 공(空)한데 새롭게 다시 생기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생김이 없으니 멸함도 없다는 말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질 뿐이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 소멸(消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가장 먼저, 생(生)과 멸 (滅)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부정이 아니라 생멸(生滅)이란 고정된 실체적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불(不)’이란 부정의 개념을 도입했을 뿐이다. 여기서 ‘불(不)’이란 부정의 의미라기보다는 ‘연기(緣起)’의 의미로 이해함이 옳다.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不]는 의미인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우리에게 존재 본성의 영원성을 시사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멸해 없어졌다고 해도 완전한 단멸(斷滅)은 아닌 것이다.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바꾸었을 뿐이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은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는 의미다. 본질이 공(空)한데 무엇이 있겠는가?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좋은 것 나쁜 것이 있지만 다른 기준으로 보면 좋은 것 나쁜 것이 없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존재의 본성은 절대 청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청정’이라는 것은 더러움의 반대 개념으로서 청정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청정성을 의미한다. 우리들이 흔히 깨끗하다, 더럽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일 뿐이다.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도 상황 따라, 인연 따라 다른 것이지, 본래 더럽고 깨끗한 고정됨이 있지 않은 법이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다는 상을 내며, 더럽다는 상을 내는 분별 심에 불과하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공성의 이해는, 어떤 사물에만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을 없애려는 사상이 아니다. 본래 더럽다거나 청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 사상이야말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인간 청정성의 회복이다. 부증불감(不增不減)은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아니고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미운 생각, 좋은 생각, 아픈 생각, 그리운 생각들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지만 생각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그 근본은 텅 비었다. 결국 아무 것도 없는데서 숱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空)의 모습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는 부증불감의 속성이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상계의 물질, 정신적 모든 존재는 양(量)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한 존재로서 원만 구족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상(我相: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와 사건, 그 나름의 자만 의식), 인상(人相:나와 남을 나누어서 보는 모습), 중생상(衆生相:본능적 고집, 즉 재미있고 호감(好感)가는 것만을 본능적으로 취하는), 수자상(壽者相:생명에 대한 고집, 영원한 수명(壽命)을 누려야지 하는 집착)을 끊어버리는 것을 수행의 궁극으로 본다. 사상(四相)의 기본은 아상에 있으며, 아상(我相)이 있기에 인상이 있는 것이다. 즉, ‘나다’ 하는 상이 있기에 ‘너다’ 하고 가르는 상이 생긴다는 말이다. 바로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우리 전체가 일체로서의 하나라는 가르침일 때,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은 사라진다. 사리자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여, 앞서 말한 몸도 마음도 텅 비어 일체가 공(空)하다는 것은 새롭게 생기는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생기는 일이 없으므로 소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더럽다느니 깨끗하다느니,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아예 생기고 소멸하는 법이 없는데 무엇이 불어나고 줄어드는 일이 있겠는가. 우리가 보아온 모든 불어나고 줄어들고, 더럽고 깨끗하고, 생기고 소멸하는 일체의 현상은 실은 환상인 것이다. 우리의 진실 생명에게 그런 일은 본래 없는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텅 빈 것이다. 공(空)의 본질 속에는 모든 것을 흡수함과 동시에 표상(表相)으로 확산시키는 상반된 작용을 갖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공(空)한 모양은 곧 '생(生)도 아니고 멸(滅)도 아니며, 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며, 더함도 아니고 덜함도 아니다'라고 해석되어진다. 이 속에는  온갖 상대 개념이 다 포함된다. 일체법(一切法)이 존재하는 모양은 바로 공(空)이기 때문에 생(生)도 아니고 멸(滅)도 아니며, 깨끗함도 아니고 더러움도 아니며, 더함도 아니고 덜함도 아닌 것이다. 반야경의 핵심 사상인 공(空)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공(空)이란, 존재 본질이며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를 공상(空相)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일체의 모든 상(相)이 (相)이 아님을, 즉 공(空)임을 올바로 본다면 여래(如來)를 본다.)라고 한 것이다. 일체법(一切法)은 공상(空相)이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공(空)의 모양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정의 논리를 통해 공(空)의 모양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시 제법공상(是 諸法空相)에서 ‘법(法)’도 역시 ‘존재의 공(空)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生)과 사(死), 유(有)와 무(無)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空)의 성질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그렇기에 공(空)인 것이다. 아울러 존재의 본질적 세계(공(空)의 차원에서는 실체가 없다는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의 고정된 실체도, 감각작용, 표상작용, 의지작용, 식별작용이라는 고정된 실체도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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