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오신 날에 ‘반야심경’ 이야기 3편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인생이란? 하룻밤 꿈과 같고, 사람이란? 물거품과 번개와 이슬처럼 잠시 나타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자연현상에 불과하다. 사람은 인연(因緣)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한평생 자신의 몸만을 위해 살아간다. 몸이라는 자체가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인데도 말이다. 내 몸을 위해  한 평생 땀 흘리고 노력하나 내 몸은 보답은커녕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원하고 바라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티끌이 될 뿐이다. 어리석게도 허망하기가 이를 데 없는 행위를 사람들은 반복 되풀이 하면서 그걸 행복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바람속의 작은 먼지가 한바탕 하늘로 치솟았다가 흔적 도 없이 사라짐이다. “봄바람에 푸른 하늘로 먼지가 날아가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요약해서 풀이하면), 색(色:육체. 보는 대상)이 공(空:실체가 없음으로 텅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고, 색(色:육체. 보는 대상)이 곧 공(空실체가 없음으로 텅 비어있음)이고, 공(空)이 곧 색(色)이다. 사리자여, 물질이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이 물질과 다르지 아니하며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과 의식도 모두 이와 같다. 사리불이여! 물질적 형상으로 나타나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텅 빈 본질세계와 다르지 않고, 텅 빈 그 본질세계 또한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형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물질적 현상의 세계는 곧 텅 빈 본질세계이며, 텅 빈 본질세계는 곧 물질적 형상의 세계인 것이다. 정신적 요소인 느낌, 생각, 의지, 인식작용도 역시 물질적 현상처럼 고정된 실체가 없이 텅 빈 것이다.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사리자는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의 설법을 듣는 사람으로, 소승불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즉, 사리자는 오온(五蘊)인 색수상행식<색(色-육체)수(受-느낌)상(想-생각)행(行-의지)식(識-판별)>이 모두 공(空:실체가 없음으로 텅 비어있음)하여 실체가 없다는 참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러한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관자재보살이 법을 설하고 있는 광경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리자는 범어로 사리푸트라(Sariputra)라고 하는데, 취자(鷲子)라고 번역한다. 음을 그대로 옮기면, 사리불(舍利弗) 또는 사리자(舍利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혜 제일의 제자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이란, 지금은 물질들이 제각각의 인연(因:직접적 원인)과 연(緣:간접적 원인)으로 인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이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시간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인(因:직접적 원인)과 연(緣:간접적 원인)이 다하여 반드시 멸하는 것이기에 공(空)하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색(色)은, 색깔이 아니라 '흔히 생각하는 물질을 포함한 실체가 있는 모든 현상'을 말한다. 물질은 법에 의해 인연생기<因緣生起: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 또는 인연(因緣: 통칭하여, 원인)따라 생겨남의 준말로> 하여 변화하고<공(空)과 무(無)를 혼동하거나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무(無)란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고, 공(空실체가 없음으로 텅 비어있음)이란 어떤 존재가 실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無)는 아예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고, 공(空실체가 없음으로 텅 비어있음)이란 있는 듯 보이지만 따져보면 그 존재의 실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집착과 번뇌의 대상이 원래 없으므로 이분법적인 관념으로부터 스스로 깨어나라는 뜻이 된다. 즉, 지금 내 앞에 있는 내 사랑하는 ‘연인’ 의 물질적 색(色)의 존재도, 지금은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반드시 인(因:직접적 원인)과 연(緣:간접적 원인)이 다해 멸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물질적 개념도 공(空실체가 없음으로 텅 비어있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색(色)으로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하고, 지금 당장에는 공(空)이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부정의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다는 표현에서는, 완전히 같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다르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공(空)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연기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말한다면, 색이라는 것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색(色)이란 우리의 사량으로 분별할 수 있는 현상계를 의미하며, 공(空실체가 없음으로 텅 비어있음)이라는 것은 그 현상계를 유지하고 있는 바탕으로서의 이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는 것은, 색(色)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만 이야기하면 될 텐데, 다시 한 번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반야심경에서는, 색(色), 다시 말해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하여, 공(空)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여 현상계를 부정하고 있다. 색(色)이 공(空)이라고 부정을 하고, 그 부정인 공(空)이 다시 색(色)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긍정을 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모두의 극단을 떠난 절대 긍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물질적 존재인 색(色)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지없는 공(空)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空)은 무아를 의미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이 곧 무아(無我:내가 없다는 게 아니고 나의 실체가 없다는 말)라는 말이다. 즉 물질적 존재인 색(色)은 미래에 인연이 다하여 흩어질 것이기에 공(空)이기도 하지만, 바로 지금 그 모습이 공(空)이라는 논리인 것이다. 시계라고 했을 때, 이 시계는 시계침, 플라스틱 케이스, 나사, 건전지 등이 인연화합으로 모여 만들어진 물질이다. 시계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부속품들이 모여 인과 연이 맞는 부품들끼리 짜 맞추어 졌을 때, 비로소 시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각기 다른 모든 부품들을 잘 결합시켜 시계라는 색(色)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기<緣起: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인(因:직접적 원인)과 연(緣: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의 법칙이 필요하다. 요컨대, 공(空)의 성질, 연기의 성질, 무자성(無自性:어떤 것에도 집착됨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의 성질이 바탕 되어야만 비로소 시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결국 시계가 성립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공(空)의 바탕 위에서이다. 그러므로 색(色)이 곧 공(空)이며, 공(空)이 곧 색(色)이라고 하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논리를 말하고 나서 다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한 것은, 앞의 그것과 같이, ‘색(色)이 곧 공(空)’이라고 부정한 데서 한 걸음 나아가 ‘공(空)은 바로 색(色)’이라는 대 긍정을 통해 절대 긍정의 논리를 펴기 위함이다.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또한 각각 색(色)과 마찬가지로 공(空)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空)이 곧 수상행식(受想行識<수(受-느낌)상(想-생각)행(行-의지)식(識-판별)>)이며 수상행식(受想行識<수(受-느낌)상(想-생각)행(行-의지)식(識-판별)>)이 곧 공(空)이라는 말씀이다.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이 대상인 색(色) 즉 육진(六塵)을 접하여 느끼는 감각작용을 수(受)라 하고 무엇이라고 알아차리는 지각작용을 상(想)이라 하며 이 상에 각자의 업습에 의한 고정관념을 섞어 나름대로의 모양을 지어 일으키는 의지작용을 행(行)이라 하고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인식작용을 식(識)이라 한다. 그런데 육근의 대상인 색이 공(空)하여 이미 실체적 아(我)가 없고 육근 또한 지수화풍 4대로 이루어진 공(空)한 색신(色身:인간의 육신)의 기관으로 공(空)일 뿐이니 공(空)이 공(空)을 대하여 나타나는 수상행식<수(受-느낌)상(想-생각)행(行-의지)식(識-판별)>은 당연히 공(空)할 수밖에 없고 무소유 즉, 있는 장소가 없는(無:무)것'이니 일체는 마음이 만들어 낸 '꿈이요 허깨비, 물거품이며 이슬이요. 그림자<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인 것이다. 그러니 한생 한생의 역사는 곧 수상행식<수(受-느낌)상(想-생각)행(行-의지)식(識-판별)>의 역사이고 이것이 업식(業識)이 되어 윤회(輪廻:일련의 변화 과정을 단계에 따라 차례로 밟아 가거나 되풀이 하는)를 거듭하지만 파도와 거품이 바다를 여의지 않았듯 한생 한생의 생명인 나는 또한 불생불멸(不生不滅: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는)의 나를 여읜 적이 없으며 수상행식 <수(受-느낌)상(想-생각)행(行-의지)식(識-판별)>또한 성품을 떠난 적이 없는 것이다.

 독자들은 삶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삶은 번개가 한 번 번쩍임과 같다. 그 번개는 어디로 갔는가?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자연 앞에 겸허해야 한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