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역신이 충절을 바친다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라 할 만하다. 하지만 충신도 사정에 따라 씻을 수 없는 역신으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치세(治世)의 명신이오, 난세의 간웅으로 널리 회자되는 삼국지에 주요 인물 조조의 일대기 또한 인간행태의 양면성을 말해주는 사례가 될 것 같다.
 고려조 초에 북방 거란족이 수차례에 걸쳐 쳐들어 왔을 때 적을 맞아 분전한 장수 가운데 ‘강조’라는 인물은 고려사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입은 역신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음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 인색한 사가들의 모습을 지워 낼 수가 없게 해 준다. 강조의 가계나 출생에 대해 후세에 전해진 내용이 없지만 멸망 직전에 있던 발해의 유민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려조 7대 목종의 신임을 받던 뛰어난 무장이던 강조는 중추사우상시 서북 면 도순검사가 되어 서북 면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가장 중요한 지역의 국방 책임자였다. 당시 목종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그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정부(情夫) 김치양은 자신들의 소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이에 대비하여 목종이 이들의 변란에 대비하여 강조에게 수도 개경을 호위하라는 왕명을 하달한 것이다.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는 그녀의 외척 김치양과 추잡한 소문을 일으켜 김치양이 귀양 간 다음 목종 즉위 후 복위되어있었다. 이 때 부터 천추태후의 강력한 지원 아래 김치양은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목종은 그를 내쫓고자 하였으나 모후의 마음을 상하는 것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치양과 천추태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이 음모를 알게 된 목종은 병을 이유로 정사를 전폐한 채 그의 후계자로 대량원군을 옹립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목종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강조에게 왕실을 호위하도록 명한 것이다.
 왕명을 받은 강조가 개경으로 향하다가 도중에서 ‘성상께서 위중하고 태후가 김치양과 모의하여 사직을 넘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을 의심하여 왕명을 위조해 죽이려고 부른 것입니다’ 라는 귀띔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왕에게 미움을 사 쫓겨난 사람들로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다.
 정확한 소식을 모르던 강조는 김치양 무리들이 이미 목종을 시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것으로 판단하여 서북 면으로 돌아갔다. 이 때 강조의 아버지가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간흉들이 권세를 잡았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국난을 평정하라’고 쓴 편지를 지팡이에 넣어 강조에게 전하게 했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향하던 중 목종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돌아가더라도 역모 죄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목종에게 ‘간적 김치양 무리들을 소탕 하겠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리면서 그들을 모두 처단한 다음 목종이 원하던 바와 같이 대량원군을 새로운 왕 현종을 옹립하였다. 강조는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유약한 목종을 대신해 좀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을 원했던 것이다. 강조의 정변 이후 1년 정도 됐을 무렵 거란의 성종이 ‘고려의 강조는 목종 왕을 죽이고 현종을 왕으로 세웠는데 이는 대역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물어야 겠다’ 면서 공공연히 고려에 대한 침략 의지를 드러내었다. 거란(요) 성종의 40만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쳐들어왔다. 강조는 통주성 남쪽으로 나가 진을 치고 수차례에 걸쳐 큰 승리를 거두고는 자만에 빠지게 되고 방심을 틈탄 적의 맹공을 받아 사로잡히고 말았다.
 요(거란)의 성종 앞으로 끌려 나간 강조는 끝까지 고려 신하로서의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성종은 강조의 살을 찢으면서 까지 투항을 종용했으나 끝까지 저항했다. 끝내 강조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성종은 강조의 목을 베었다.

 진시황의 진(秦)이 망하고 항우와 패권 다툼에서 승리한 유방이 한(漢) 나라를 창업하자 신하들이 온갖 찬사를 늘어놓았다. 유방이 대꾸했다. ‘귀공들은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는 소리요.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나는 진영의 장막 안에서 작전을 세우고 천리 밖에서 승리를 다투는 일은 장량을 따르지 못하오. 내정의 충실, 백성의 안정, 군량미의 조달, 보급로의 확보를 도모한다는 일은 소하를 당하지 못하오. 백만 대군을 마음대로 지휘하여 승리하는 능력을 따질 때에는 한신에 비교되지 못하오. 짐은 이 호걸들을 뒤에서 조종할 수 있었소. 이 세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호걸들이오. 그러기에 짐이 천하를 얻은 것이오. 항우에게는 범증이라는 빼어난 인물이 있었으나 그는 그 한 사람조차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였소. 그래서 나한테 진 것이요’. 라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처럼 세 사람의 공로 중에서 우열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군사 면에서는 한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었던 천하통일이 이루어 진 것이다. 천하통일 전 한신이 여러 강력한 제후국들을 병탄하고 그의 책사 괴철과 독대하여 아래와 같은 대화가 오갔다. ‘장군의 관상을 보면 제후의 지위가 고작입니다. 그나마도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등을 보니 고귀하기 이를 데 없군요’. ‘무슨 뜻이요?’. ‘천하가 어지러웠던 당초에는 영웅호걸들이 다투어 왕이라 칭했지만 오로지 진짜 근심은 어떻게 하면 진(秦) 나라를 멸망시키느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죠 ?’. ‘유방과 항우의 운명이 바로 장군의 손에 달려있다는 뜻이지요’. ‘나한테 ?’. ‘장군께서 한(漢)나라를 위한다면 한 나라가 승리하고, 초(楚) 나라를 위한다면 초나라가 이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얘기요 ?’. ‘결론적으로 말씀드려 한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양분해 존립하고 또 장군께서 가세해 독립하게 되면 천하는 안정된 솥 밭처럼 삼등분 되게 됩니다. 이런 형세는 어느 누구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고, 때가 왔는데도 단행치 않으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나더러 독립하라는 얘기요 ?’. ‘한마디로 그렇습니다’. ‘한왕 유방께선 나를 매우 후하게 대접했으며 자신의 수레에 나를 태웠고, 자신의 옷을 내게 입혔으며, 자신의 식사로 내게 먹여주었소. 내가 듣기로는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의 걱정을 제 몸에 싣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그의 걱정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밥을 먹는 자는 그의 일을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내 어떻게 나만의 이익을 바라고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소 ?’.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하는 자는 몸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을만한 자는 받을 상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장군은 군주를 떨게 하는 위력을 지니시고 상을 받을 이상의 공로를 가지고 계시는 데다 명성은 천하에 드높으니 저는 장군께서 위험천만한 위치에 계신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한신은 괴철 나름대로의 충심어린 간언을 무시한 채 끝까지 유방에게 충성하여 대업을 이루자마자 역신으로 몰려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그만한 동기와 분위기가 있어야 함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앞 수레가 넘어져야 뒤 수레가 경계하게 되어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야말로 극대의 충성심이 필요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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