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칼럼니스트
 노을 진 석양은 아름답다. 우리네 삶도 황혼녘이 있다. 갈무리 잿빛이 아름답듯이 황혼녘 선(宣)한 부자의 삶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노욕(老慾)에 찬 천(賤)한 부자, 즉 졸부(猝富. mushroom)의 삶이 구역질을 안기는 사회의 한 단면이 씁쓸할 때가 많다. 삼라만상 천지신명은 인간에게 억만 겁의 찰나적인 순간을 살게끔 태어나게 할 뿐, 영원한 삶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생이란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백년도 채우지 못하는 삶이거늘. 언젠가 순차적으로 미지의 세계를 가려고 아케론(Acheron) 강이나 삼도천(三途川)을 향해 손을 맞잡고 건널 때 고작 뱃삯 몇 푼을 건네면 되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런데도 탐욕이 태산을 넘듯이 하늘을 찌른다. 이 땅에 오는 것도 동지요. 또한 찰나를 살다가 저 세상의 존재에 대한 의문 속에서 함께 가기에 우리들 삶은 다들 동지들이다.

 세상사 어릴 때는 식욕, 젊을 때는 성욕도 탐했다. 그리고 중천에서 빛을 발할 중년 때는 명예와 부도 가졌다. 그러다가 황혼녘 삶까지도 탐욕에 찬 나머지 이 사회와 이웃을 보듬지 못하는 행태는 추하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죄악 중에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이 없다" 고 했다. 그런데도 통상적으로 생의 끝자락에 서면 지나침이 없어야 함에도 그르치기도 한다. 끝없는 노욕에 후배들에게 설 곳조차 제공하지 않는 '그들만의 굿판'만을 보다가 돌아서는 경우도 허다하다. 조선조 시인이자 비평가(평론가)이며 정치가였던 허균은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죽음에 이렇게 읊었었다.

 "-상략-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나니/ 오랜 세월 머물지 못했어라.// 구름 가득 덮인 광릉의 무덤길이여/ 밝은 해도 가리웠으니 죽음의 집이어라.// 빽빽하게 둘러싸인 숲 속 어둑한 곳이여/ 그대의 혼은 흩날리면서 어느 곳으로 가시는지. -하략-"

 그렇다. 대체적으로 천 년을 살 것처럼 끝남을 망각한 채 산다. 찰나의 삶에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이러함에도 빈 깡통이 요란한 줄은 안다만은, 세속적인 부(富)만으로 어떤 모임에서든 혼자서만 말이 많거나 그에 빌붙은 간신배까지 있어 곤혹스러움을 안길 때가 있다. 이 세상에 함께 태어나 또 있을 듯한 저 강을 건너 저 세상으로 갈 친구이자 동지임에도 티끌만큼의 나눔도 없이 후세에 그 재물은커녕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는 천한 부자들의 삶을 본다. 그릇된 탐욕으로 끝없이 질주하다가 추악한 삶에 종지부를 찍기에 위대한 삶이었다고 볼 수 없다. 조선조 허균의 형제는 물욕이 없어도 한 세상 밥 먹고 살면서 여느 군상과는 달리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상 졸부는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어디를 가나 선한 부자나 식자(識者)는 말이 없고 '졸부의 향연'이나 '노욕의 굿판'인 경우는 그렇게도 씁쓸함을 넘어 구역질을 안길까? 천한 부자들은 골프장에서 드라이브샷을 날리다가 공이 소나무에 맞아 튕겨 나오면 골프채를 탓하며 용품은 바꾸어도 어려운 지인이나 이웃에 베푸는 게 없다. 세속적인 부만 돈(錢)인 줄 알고, 지적재산권 같은 정신적 부의 가치를 부여하거나 돈으로 환산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봇물 터지듯 좋지 않은 언변으로 소란스럽다. 빈 배의 흐느적거림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들이 내미는 생색내기 한 끼 밥이나 그 술이 쓰다. 한 끼 잘 먹으려고 아귀다툼하지 않는 맑은 영혼이 눈살을 찌푸리기에 이들은 끝내 '졸부증후군(Sudden Wealth Syndrome)'을 앓기도 한다. 자신의 부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국가와 이 사회의 구성원이 음으로, 양으로 일조했단 사실은 망각한다.

 그러기에 굴곡진 삶에도 아낌없는 1%의 나눔이나 말년에 자신을 다스려 전 재산을 나누거나 환원하는 선한 부자가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이러한 이들과 '카네기'나 '워렌 버핏'을 우리는 졸부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덕을 이 사회에 부여하거나 환원하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는가? 그러기에 현세는 물론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 반면 황혼녘의 탐욕에는 진정한 후배들도 없다. 인색하고 추한 노년에 후배들도 따르지 않기에 이러함이 없어야 하고, 말(言) 수도 적어야 하는 법인데 이러하지 않으니 인생말년을 망치기도 한다. 이에 허균이 살았던 400년 후를 사는 현세의 본 비평가도 언젠가 이렇게 읊었다. '노욕과 졸부들의 행태'를 보고 버리는 삶을 살겠다고.

 "-상략- 여태까지의 삶에 탐욕이 있었거든/ 다 버리는 자세로/ 나를 버티게 한 고마움에/ 이 사회와 후진들을 위해// 내 곳간을 풀고는/ 인색한 삶의 추태를 보이지 않으며/ 항상 경청하는 자세를 가지고/ 어차피 이승과 저승의 교차점에서// 남김 없는 삶이 아름답기에/ 궁핍한 동료에게 베풀며/ 알량한 부와 지식은 이 사회를 위해 던지면서/ 내가 살아온 길이 옳다는 아집에 빠져/ 젊은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겠다// -중략- 노욕과 늙은이의 추태를 없애는/ 넉넉한 품성으로/ 삶의 진한 황혼녘 잿빛이 되어/ 책 한 권만을 남긴 채/ 잔치 속 아름다운 이별이고 싶다."

 이렇게 형상화한 비평가인 나 또한 이 땅을 살다 갈 세속의 동지임은 뛰어넘을 수 없다. 베풀지 못하면서 이름값을 하려고 술 한 잔 내려는 천한 부자의 술값보다 문사의 영원한 지적재산권을 베푸는 삶이 더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자신의 위치와 그 능력이 '자신만의 몫'이란 사고를 버리는 고귀한 자세가 아름답다. 티끌만큼이라도 베푸는 자세로, 삶의 동지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자. 우리들의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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