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마음 놓고 해도 좋은 일이 있고,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의사소통에서도 국어의 예삿말은 ‘말’이고 높임말은 ‘말씀’이다. 이 ‘씀’ 이 바로 ‘삼’과 같고 ‘삼가’로 된다. 그러니까 ‘두려움으로 조심 또는 경외하다’ 정도의 뜻일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흔히 우리가 외래어인 것으로 ‘샤먼(shaman 呪術師 또는 巫堂)’이 국어인 ‘삼가’에서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것뿐이다.
 어른이나 신령에게는 근신, 공경,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고, 사람과 신령간의 의사소통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무(巫)’자의 모양을 보면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위아래의 한 일자(一)로 막힌 곳이  있고, 가운데를 기둥으로 받친 모양의 ‘공(工)’자의 양 옆에 사람이 둘인(人 +人)모양이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유학(儒學)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받드는 순(舜)에게는 완악한 그의 아버지 고수(瞽叟)와 사나운 계모, 그리고 오만한 이복동생 상(象)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순을 미워하고 해치려고 했다. 순은 부지런히 농사지으며 효성을 다했으나 부모는 여전히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순은 부모의 뜻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할 뿐, 더욱 부모를 사모했다.
 요(堯)임금이 순의 덕을 사모하여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고 아홉 아들을 순이 농사짓는 들에서 순을 섬기게 했다. 천하 사람이 순에게 돌아가므로 천하를 순에게 물려주어 순으로 하여금 천자(天子)가 되게 했다. 천하 사람이 모두 자기를 따르고, 아름다운 아내를 거느리고, 천하를 소유하는 부(富)를 누리고, 천자의 존귀한 몸이 되었으며, 인간의 영화가 더할 것이 없건만 그것으로도 순의 근심을 풀 수는 없었다. 오직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흐는 것만이 근심을 푸는 길이었던 것이다.

 어릴 때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여색을 알게 되면 젊고 어여쁜 여자를 사랑하고, 처자 있으면 처자를 사랑하는 것이 인정(人情)이건만 순은 늙기에 이르기 까지도 부모를 사랑하는 간절한 듯이 변함이 없었다. 나중에는 그 완악하던 아버지도 순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마침내 인자한 아버지로 변했고 천하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당시의 도덕 질서가 확립된 이상사회가 구현되었다. 부모가 오랜 수(壽)를 누리심은 기쁜 일이지만 앞으로 섬길 날이 오래지 못함을 두려워하고 탄식하였다. 부모가 살아계신 동안에 시간을 아껴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힘을 다하여 봉양하여 나중에 후회나 유감을 남기지 않으려 애썼던 것이다. 또한 유가(儒家)에서는 하늘이 인간에게 착한 성품을 부여했다고 주장하고, 그 선(善)이야말로 인간이 가야할 길이라고 제창한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을 행하면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도움을 얻어서 인생행로의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광명과 성공을 기대하지만, 악한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한다면, 그 앞날에 암흑과 비운이 있을 뿐이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무한한 기쁨을 느끼지만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괴로우니 선이 곧 행복이요 악이 곧 불행임을 말해주고 있다. 선이라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말아야 하며 악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행하지 말아야 함을 외치고 있다. 이 글은 순의 행적과 유가의 기본 정신 중 일면을 간략하게 요약한 예문이지만 삼가야 할 일이 부모에 대한 효(孝)만이 전부는 아니고 두 사람 이상이 더불어 사는 사회(社會)라는 집단의 일원으로 제 구실을 하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가야 할 일들이 많다.

 이제 우리의 시각이 아닌 외국인(러시아)의 시각으로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 ‘샤먼(shaman)’ 또는 ‘삼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삼가’는 근신 또는 경외에 가까운 뜻이고, ‘샤먼’은 종교적인 의미가 짙고 심지어는 요술이나 미신으로 까지 치부하기도 하지만 원래의 뜻은 삼가와 마찬가지로 어른이나 신령에게 공손하고 경건하게 고해 올린다는 데는 근원이 같다. 또 참고할 일은 조선말 당시 열강들이 우리 조선을 식민지 화 하기 위한 기초조사의 일환이었다는 점도 관심 있게 보아 둘 일인 것 같다(1,900년 발간).
 ‘한반도에 정주했던 부족의 원시종교의 원천을 이루는 것은 샤머니즘이다. 그리고 이 샤머니즘은 아직까지 아시아의 전 동북부에 있어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선사시대에 이곳에 살고 있던 제 민족의 종교적 관념의 유일한 형태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 고구려와 기타의 부족 국가들의 부족에 관한 역사적 보고서는 그들이 땅, 하늘, 대기, 언덕의 수호신, 토지, 동굴과 심지어는 호랑이의 신령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 지적되고 있다.
 특히 그들은 하늘과 샛별을 숭배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자연과 그것의 힘에 영성을 부여하고 동시에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남으며 그렇게 존재하기 위해서 산 사람에게 진상물을 바치도록 요구한다고 믿는 생각은 보편화 된 관행인 것 같다. 하늘에 대한 숭배사상이 한국 샤머니즘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기에 지상의 모든 행복, 식물의 성장, 곡식의 보전과 성숙, 질병으로 부터의 구제 등이 하늘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다. 한국인들은 하늘을 가시적(可視的)인 세계의 창조자이며 수호자라는 상제(上帝)라는 높은 존재에 관한 관념을 결부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 관념은 불명확하고 무한정 적이며,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간에 모든 것이 하늘에서부터 연유한다는 확신에 귀착하고 있다. 때문에 예를 들면,  일 년 계속해서 내리는 폭우, 홍수, 메뚜기의 출현, 지진등과 같은 일반적인 국민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 한국인들은 하늘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거국적으로 상제에게 구제를 비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경우 정부가 지방당국에 이들 의식을 거행하라고 위임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늘을 숭배함과 동시에 한국인들은 자연의 모든 물체에 수많은 신 또는 귀신의 존재를 입식(入植)시키면서 가시적인 자연에 영성(靈性)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샤머니즘은 보다 범신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들 귀신은 땅, 대기와 바다에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귀신은 그늘진 나무마다 어두운 골짜기마다에 투명한 시내와 산의 협곡에 살고 있다. 또 이들 귀신은 지붕, 천정, 부뚜막과 대들보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굴뚝, 차양, 살림방과 부엌에도 가득 차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귀신은 모든 마루와 물주전자에도 살고 있으며 한국인들 주택 구석진 곳은 이들 귀신에 속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귀신은 한국인 생애의 모든 관계에서 그와 같이 동행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 귀신의 호의 여하에 따라서 그의 모든 안녕이 좌우되는 것이다. 이것은 선사시대에 있어서 이들 귀신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 심지어 산 사람 까지 희생시키는 전제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이들 귀신에 대한 난폭하고 혹독한 봉사형태는 점차적으로 완화되었다. 무당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 이전부터 마술을 공부한 사람으로부터 얼마간의 마술법의 습득과 초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사명이 요구된다. 이 경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이 사명이라는 것은 신령이 그의 부름을 받은 여자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녀의 몸속에 강고(强固)하게 살고 있어 신령의 의지에 완전하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 여자는 자기가 발병한 것처럼 느끼며 이 병은 한 달에서부터 삼 년까지 계속되어, 발병 기간 그녀는 용, 무지개, 꽃핀 복숭아나무가 되는 무장한 사람을 꿈에서 보게 되며 이것들은 갑자기 어떤 짐승으로 변해 버린다. 이러한 환상의 영향 밑에서 그녀는 예언을 시작한다.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칠성신(七星神)이 무당에게 만신이라는 명예로운 직함을 내려 준 신병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이다. 신령의 부름에 복종을 하고 난 후 여자는 부모,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모든 친척들과 사회적인 연계관계를 끊게 된다. 그녀에게는 오직 신령의 부름만이 들릴 뿐이다. 한국인들은 모든 세계가 여러 가지 귀신으로 채워져 있다고 믿는 관념과 함께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갖는 이러한 귀신들이 대부분 다양하고도 환상적인 동물들로 변화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는 신화로 창조하여 지니고 있다.’ 불과 백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의 삶 그 자체일 것인데 아주 먼 동화의 나라, 남의 나라, 지구 밖의 얘기처럼 신기하고 생소한 얘기로만 우리에가 다가올 수도 있다.
 지금의 불교, 기독교 등 종교의식 속에도 이들 토속 종교의 화석은 여전히 존재한다.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그 행동이 하느님 같고 성인군자의 그것과 같다면 ‘삼가야’ 할 일이란 존재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모든 인간은 그래도 내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 바로 그 ‘삼가’가 몸에서 떠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행복이 보답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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