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했던 새마을 정신 등으로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등 힘차고 희망찬 구호들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기만 하다. ‘그럴 수 있다’라고 한다면 이런 힘찬 구호들과는 약간 다른, 조선조 초기 황희 정승 같은 ‘너도 옳고, 또 자네도 옳고, 당신도 옳습니다’ 하는 도무지 줏대라고는 약에도 찾아볼 수 없는 미지근하기가 뜨물보다 더 한 그야말로 싱겁고도 재미라고는 없는 대답이지만, 황 정승의 대인다운 너그러움은 두고두고 존경의 표상이 되어 왔던 그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할 것 같다. 듣기에 따라서는 남의 일이니 그저 무관심하고 시큰둥한 ‘관심 없습니다’ 라는 대답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1930년대 중엽, 극단 ‘연예좌’ 일행이 중국의 조선인 부락을 찾아 순회공연을 할 때였다. 중국의 동북지방인 용정에서부터 여러 곳을 거쳐 두만강 대안의 작은 도시인 도문의 조선사람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면서 경영하는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다. 마침 가을이라 단풍나무 하나는 새빨갛게 물들었고, 하나는 샛노랗게 물이 들어 집 떠난 나그네의 향수에 젖어들게 된다. 기미년 독립운동 때의 탄압을 피해 고향을 떠나면서 가지고 왔던 단풍나무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부산 출신의 작곡가 이시우(본명 이만수 1913-1975)가 밤이 깊도록 자리에 누워 사색에 빠져있던 중 옆방에서 난데없는 여인의 비통하고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작곡가는 오열하는 여인의 사연을 알아본다. 여인의 남편은 만주 땅에 와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그만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이 소식을 듣게 된 여인은 간난신고하면서 두만강을 건너와 남편이 끌려간 형무소를 찾았으나 그 남편은 이미 일제에 총살 된 뒤였다. 나라 일은 슬픔에 남편까지 잃고 설움에 겨운 여인은 마침 그 날이 남편의 생일이라 조용히 술이나 한 잔 부어놓고 생일제를 지내려던 참이었다. 여관집 주인이 이 여인의 남편과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지라 이를 알고 제물을 차려 들어왔다. 여관집 주인이 차려준 제상에 술을 붓고 난 여인은 그만 솟구쳐 오르는 오열을 참지 못하여 밤중에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이 여인의 피맺힌 절규 ‘그리운 내님(내 조국)이여’라는 절규가 노랫말이 되고 조국 일은 비통함이 멜로디가 되어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탄생하게 된다. ‘불쌍하신 우리 부친 생존한가 별세한가, 부처님이 영험하야 기간에 눈을 떠서 소경축에 빠지던가, 당년 칠십 노환으로 병이드러 못오신가, 오시다가 노중에서 무삼낭패 보셨는가 살아 귀히 될 줄 알으실 길 없으니 원통토다’. 이렇듯 탄식하더니 이윽고 모든 소경이 궁중에 들어와 버려 앉았는데, 말석에 앉은 소경 가만히 바라보더니 머리는 반백인데 귀 밑에 검은 때가 부친이 분명하다, 심황후 시녀를 불러 분부하되 ‘ 저 소경 이리로 와 거주성명 고하게 하라’. 심봉사가 꿇어 앉았다가 시녀를 따라 탑전(榻前)으로 들어가서 세세 원통한 사연을 낱낱이 말삼한다. ‘소맹은 근본 황주 도화동 사옵는 심학규옵더니, 이십에 안맹하고, 사십에 상처하야, 강보에 쌓인 여식 동냥젖 얻어 먹여 근근히 길러 내야 십오세가 되었는데, 일흠은 심청이라, 효성이 출천하야 그것이 밥을 비러 연명하야 살아갈 때, 몽은사 부처님께 공양미 삼백석을 지성으로 시주하면 눈 뜬단 말을 듣고 남경장사 선인들게 공양미 삼백석에 아조 몸을 영영 팔려 인당수에 죽삽고 눈도 못 뜨고 자식만 일었삽나이다’. 세세이 말 외니 황후 말을 들으니 자기 부친 완연하다, 보선 발로 뛰어내려 부친의 목을 안고, ‘ 아바지 살아왔소, 내 과연 물에 빠진 심청이요, 심청이 살았으니 어서 급히 눈을 뜨시고 딸의 얼굴을 보압소서’, 심봉사 이 말을 듣고 ‘어따 이게 웬 말이니’ 대경하난 중에 두 눈을 번쩍 뜨니 일월이 조요(照耀)하고 천지가 명랑하다. 딸의 얼굴 보니 갑자 사월 초 십일야에 보던 시녀로다. 딸의 목을 안고 일희일비하며 하난 말이, 불상하다 너의 모친 황천으로 돌아가서 내가 너를 잃고 수삼년을 고생으로 지내다가 황성에서 너를 만나 이 같이 좋와하는 양을 알까부냐, 춤추며 노래하되 죽은 딸 다시 보니 인도화생(人道化生)하여 온가, 어두운 눈을 뜨니 대명천지 새러워라, 부중생남중생녀(父重生男重生女) 나를두고 이름이라, 지와자 좋을시고. 이렇게 좋와할제 무수한 소경이 춤 추고 노래하며 ‘산호(山呼) 산호 만세(萬歲) 만세’ 부르더라. 심봉사를 조복 입혀 황제께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내전(內殿)에서 입시(入侍)하여 적년회포(積年懷抱) 들으시고 별궁을 정하시니, 황제 심 학규로 부원군(府院君)을 봉하시고 안씨(安氏) 맹인으로 부부인(府夫人)을 봉하시고 도화동 거민은 금세신역(今歲身役)을 없이하니 심황후 같은 효행은 억만고(億萬古)의 으뜸이라. 우리의 고전(古典) 심청전 중 한 대목이다. 눈 한 번 떠 봤으면, 혼자서 내 다리로 걸어보았으면, 지긋지긋한 당뇨에서 벗어나 보았으면 하는 등등이 있을 수 있고, 북한 사람일 경우 ‘쇠고기 국에 쌀밥 싫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소망도 있을 수 있다. 심봉사와 심청이 그토록 원하던 눈도 멀쩡하고, ’눈물젖은 두만강‘이 말해주는 나라의 독립도 찾았고, 멀쩡한 다리, 손과 발, 거기다 미모와 머리, 건강 까지 더 보태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불만이란 말인가. 이 간절한 ’그래 봤으면‘이 이미 ’그리 되어 있는‘ 우리이기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더욱 더 인간다운 가치 있는 삶을 가꾸어 나가는 일만이 남은 생애의 전부여야 한다.서재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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