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기생(妓生) 월이 이야기’는 고성 사람들에게 예로부터 말과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일 뿐이다. 구전(口傳:입으로 전하다) 은 구비(口碑)라고도 하며 그것은 문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어떤 사회에서 역사나 문학작품, 법률 또는 지식 따위를 글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대대로 전승하는 방법이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이나, 글의 혜택에서 소외된 계층에서 이루어진 전승법이다. 구비문학의 위험성은 구전[口傳]을 통해 얼마나 원래의 형태가 유지되느냐? 하는 "안정성"의 문제이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첨삭이 되고 나중에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란 구전[口傳]에서 ‘호랑이가 직접 담배를 피웠다.’ 라고 사실화 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단군신화를 살펴보자. 곰이 굴속에서 백일동안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 가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고 사실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구전[口傳]으로 전해내려 오는 것이 사실화 된다는 인식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특별히 역사적 구전[口傳]은 더욱 오류의 위험도가 높아서 역사의 오류를 왜곡할 위험에 노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妓生) 월 이의 구전[口傳]을 소설화 한 작가는 그의 책(참조: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기생(妓生) 월이편)머리에서 분명히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책 내용을 살펴보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문외한 분들에게는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설사 기생(妓生) ‘월’이에 대한 구전[口傳]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전[口傳]의 영역 안에서 다루어야지 실제적 역사인 것처럼 서술하면 그건 역사를 날조하는 잘못을 범할 염려가 있는 것이다. 소설[小說] 이란? 낱말 그대로 허구의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과 구성력을 가미하여 산문체로 쓴 문학의 한 갈래이다. ‘기생(妓生) 월’ 이에 대한 책이 출간 될 때도 언론에서는 소설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장편소설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가 출간돼 나왔다. 작품소재인 ‘월’이는 오래전부터 고성사회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설화속의 인물이다. ”(참조: 2012.05.11. 고성미래신문) 그리고 이 신문의 기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한산대첩보다 먼저 치른 당항포대첩(唐項浦大捷)에서 결정적으로 승리를 이끈 일등 주인공으로 기생(妓生) 월 이는 일본의 대 함대 26척의 3,500여 명이나 되는 수군을 전멸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 저서의 작가는 “진주의 논개는 적장 하나만 안고 죽었으나  고성의 기생(妓生) 월 이는 왜적의 함대 26척과 약 3000여명의 적 수군을 대파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참조;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의 월이편) 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역사의 어느 곳에도 당항포대첩(唐項浦大捷)에서 기생(妓生) 월 이가 공을 세웠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명확히 규정짓는 것은 이것이야 말로 역사의 조작사건이며 역사인식의 무지 탓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서 역사를 기술한자의 편견적 인식이 존재하더라도 정통적 문자적 역사기록을 인정하고 중시해야 한다. 또한 작가는 “고성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 정확하게는 420년 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는 1592년이고 지금이 2012년이니까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기생 (妓生) 월 이에 대한 이야기다.” 라고(참조: 고성의 겉살과 속살 월 이편) 말하고 있으나 이 주장에도 모순이 발견된다. 구전[口傳]의 특징은 낱말 그대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구전[口傳]의 발생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420년 전이라고 단정지우고 있으니  이것은 구전[口傳]의 본래 의미를 퇴색시키는 스스로의 자기모순에 빠진 셈이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생(妓生) 월 이의 소설[小說] 이야기의  실체를 말하고자 한다. 먼저 조선 후기의 기생(妓生) 월 이의 실존과 활동무대인 무기정(舞妓亭)에 대해 알아보고 임진왜란 때의 해전과 월 이가 조작했다는 당항포 해도[海圖]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기생(妓生) 월 이가 언제 어느 시대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위에서 밝혔듯이 역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실존인물이 아니고 당항포 해전에 관한 기록도 없다. 조선 후기의 이름난 기생(妓生)들은 역사서에도 잘 나와 있으며 또한 기생(妓生)을 일종의 제도로 정착시켜 국가가 직접 관리 감독하였고 기생(妓生)은 관기[官妓]로서 관가에 등록된 기생(妓生)만이 기생(妓生)활동을 할 수 있었으므로 웬만한 기생(妓生)은 역사서에 기록되어졌으나 조선 후기 역사서에는 기생(妓生) 월 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럼 먼저 조선 후기 이전의 기생(妓生)에 대해 살펴보면 기생(妓生)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관청이 있었는데 행의(行義)·가무·습서(習書)·회화(繪畵) 등을 가르쳤다. 그 이유는 기생(妓生)의 접객 대상이 위로는 국왕·왕자와 정부관리·학자·유생(儒生)에서 일반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져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 능해야 했기 때문이며 조선중기 이전의 고성지역은 주로 무기정(舞妓亭)에서 양반들을 대상으로 가무를 즐겼다. 기(妓)와 창(娼)의 종류와 등급으로 유지되던 기생(妓生)은 사회 최하층계급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세분화되어 대체로 일패(一牌)·이패(二牌)·삼패(三牌)로 나뉘었다.
 일패(一牌)는 기생(妓生), 이패(二牌)는 은근자(殷勤者), 삼패는 탑앙모리(塔仰謨利)라 불렀다. 기생(妓生)은 가무를 익혀 국가행사 및 상류사회의 각종 연회에 참석하던 관기[官妓]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집에서 사사로이 대접도 하였는데 유녀(遊女) 중에서는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30세가 되면 기계(妓界)에서 은퇴해야 했으므로 이패(二牌)는 기생(妓生)보다는 수준이 떨어지지만 대체로 기생(妓生)출신이 많았다. 은근자라 한 것은 남몰래 은근히 매춘(賣春)한다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며 삼패(三牌)는 매춘(賣春) 자체가 직업으로 접객할 때에는 잡가(雜歌)만 부르고 기생(妓生)처럼 가무는 못하게 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회적 계급제도가 철폐되는 시기였으므로 관기[官妓]에서 민기[民妓]로 그 역할이 변화되고 있었다. 이름 없는 기생(妓生) 월 이가 조선 후기에 존재했다면 길가는 나그네를 접대하기 위한 주막집[酒幕:시골 길가에서 밥과 술 따위를 팔고 나그네에게 잠자리도 제공하는 집](무기정(舞妓亭:)의 삼패(三牌)신분 정도의 잡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다. 이런 무지한 기생(妓生)이 왜놈의 조선침략에 대한 역사의식도 없었을 것이고 고성지역의 고지도(古地圖)를 읽을 수 있는 수준도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고성의 고지도(古地圖)에 나오는 무기정(舞妓亭)은 관기인 기생이 양반들과 가무를 즐기던 장소였으나 기생(妓生) 월 이가 기거했던 무기정(舞妓亭)은 길 가든 나그네를 접객하던 주막집 정도였다. 이런 수준의 주막집 작부 정도의 기생(妓生)이 일본첩자의 당항만 전략지도(戰略地圖)도를 조작하였다는 사실은 수긍하기가 힘 든다.
 그리고 조선말기의 고지도(古地圖)를 보면 지도의 작성 방법이 현재와는 완전히 틀린다. 현재 지도는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으나 조선 후기의 지도나 고지(古地圖)도는 측면적으로 그려져 있고 지도를 실물처럼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관청, 군사요새, 마을, 인구 혹은 강이나 산 등을 매우 세밀하게 그렸다. 이렇게 그려진 고지도(古地圖)는 활자판으로 찍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용하던 붓으로는 지도를 수정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막집(무기정:舞妓亭)에 붓과 벼루의 사용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당항포대첩(唐項浦大捷)의 부분에서 “소소강에서 고성만 바다까지 뱃길이 있는 양 지도 위에 굵은 선으로 그어져 있으므로 왜장은 그 지도를 따라 소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겠지.  가다가 길이 없음을 알고 후퇴를 하고 있을 즈음에 이순신 함대가 들이닥치자 적들은 물러서자니  퇴로는 없고 나아가자니 이순신의 막강한 함대가  우왕좌왕 하다가 전멸되었거든.” 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참조: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 월이편) 이건 당항포대첩(唐項浦大捷)의 실제를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당항포 대첩(唐項浦大捷)은 1592년 음력 6월5일 당항포(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앞 바다에서 임진왜란 후 일본군에 대한 조선군의 첫 번째 승리였던 음력 5월4일의 옥포해전 이후 약 한 달 사이에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등 다섯 번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하고 여섯 번째로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승리한 해전이었다. 이순신의 승전 장계에서 소소강이라고도 부른 이 당항포(唐項浦) 앞바다에서 지난 한달 간에 조선 남해안에서 치루어진 다섯 번의 모든 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왜의 수군 전선들은 겁에 질려 당항포(唐項浦) 포구 깊숙이 정박하여 틀어박혀 바다로 나오지 않고 있었으나 이순신 연합 함대의 유인 전술로 바다로 나왔다가 일본 수군의 전선 26척이 모두 당항포(唐項浦) 바다에서 격침되었는데 이 전투를 1차 당항포(唐項浦) 해전이라고도 부른다.

 사실이 이러하니 작가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내용이 된다. 마지막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의 수장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난 후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이때 왜(倭)의 수군의 주력부대는 대부분 무사출신 왜구([倭寇]: 작은 키의 몸집 13~16세기경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약탈을 일삼고 다니던 일본 해적)였다. 이들은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그들은 남해안 지리에 무척 밝아 마치 자신의 안방으로 드나들 듯 우리백성에게 약탈을 일삼았다. 이렇게 남해안 지리에 밝은 왜의 수군이 첩자의 조작된 전략지도(戰略地圖)를 통해 소소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전멸 당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당항포(唐項浦) 승전이라니 기가 막힌 이야기다.
 필자는 당항포(唐項浦)의 1차 해전과 가공인물 기생 월 이의 이야기가 관련 없음을 밝히는 바이며 이것은 작가가 꾸며낸 소설임을 고성군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혹시나 왜곡된 역사의식을 갖지 않길 바라며 소설은 역사와 다름을 알아야한다. 고성군청에서도 허구의 소설을 실제인양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앞장서고 각종행사를 추진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은 이순신장군의 당항포대첩(唐項浦大捷)에 폐[弊]를 끼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인식시키는 일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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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무기정(舞妓亭): 1765년『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있는 고성의 지도에는 고성(固城) 북쪽에 (舞妓亭)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1804년의 고지도인 「해동지도(海東地圖)」의 「고성현지도(固城縣地圖)」에는 지도안에 집이 그려져 있고 (舞妓亭)이라 표기되어 있다. 19세기 말 「고성부지도(固城府地圖)」에는 구읍기(舊邑基) 북쪽에「舞鶴山」이 있고 그 앞에 (舞鶴亭)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지도(古地圖)에는 「舞妓亭」, 「舞鶴亭」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특기할 만한 것은 1804년의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집(家屋) 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기정(舞妓亭)이라는 정자(亭子)를 표기한 것이다.
기생(妓生): 예전에,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등으로 멋스럽게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官妓)로서 관청에 딸려 가무와 기악 따위를 하는 여자를 이르던 말. 조선은 기생을 일종의 제도로 정착시켜 국가가 직접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였다. 기생은 기본적으로 관기로서 관가에 등록된 기생만이 기생활동을 할 수 있었다. 양반이 풍유를 즐기는 곳에 기생을 불러와서 함께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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