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고려 말 원(元)나라의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전 백성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참극을 당하고 있을 때 세계 최강의 세력인 원(元)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속이 후련하도록 목숨이 끊어질 때 까지 저항하다 아름답게 산화(散華)한 삼별초(三別抄)의 정신을 아직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역사의 기록인 고려사에서는 이를 삼별초의 난(亂)이라 적어놓고 있지만 이들이야 말로 애국의 표상으로 칭송 받아 마땅할 일이다.
 고려의 후반부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도둑이 들끓는  어지러운 치안에 대비한 경찰 겸 군(軍) 역할을 한 일단의 무리를 야별초(夜別抄)라 하였고, 그 규모가 커지자 좌 . 우 별초로 분리시켰고, 나중에 몽골(元)에 붙잡혀 갔다가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신의별초라 부르면서 좌별초, 우별초, 신의별초를 합하여 삼별초(三別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최씨 정권이 끝나고 40여 년간 몽골에 강화도에서 저항하던 고려는 원종 때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에 굴복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개경의 고려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왕족인 왕온(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개경 정권과 몽골에 강하게 저항하고 나선 것이다. 새 왕과 조정을 세운 배중손은 삼별초에 협조하지 않는 세력이 늘고 있는 강화를 버리고 진도로 도읍을 옮겨 저항의 기지로 삼았다.
 삼별초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인근의 모든 배들을 끌어 모았다. 원종은 김방경을 추토사로 삼아 삼별초를 토벌하게 했으나 삼별초의 강력한 저항을 감당할 수 없었고 몽골군 까지 합세하고도 삼별초군을 제압할 수 없었다. 삼별초군은 전라도의 각 고을을 장악하여 식량 등 군수물자를 확보하고 기세를 올리면서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까지 세력을 넓히자 개경의 왕궁에 까지 삼별초 세력이 형성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삼별초는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 이르는 해상왕국을 이루는 데 성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러 차례 총 공격에 실패를 거듭하던 여 . 몽 연합 수군은 단단히 사전 준비를 한 다음 다시 전보다 더 많고 강한 연합군으로 진도를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진도가 함락되고 만다. 그러자 김통정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 1년 이상 저항하다가 장렬하게 그 불꽃같은 저항의 막을 내리게 된다.

 ‘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 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들에게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그 때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롯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를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제자들이 예수의 시킨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 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여 짜 오 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대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번 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대답하였도다 하시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 잡는지라. 예수를 판 유다가 그(예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 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컬었느니라’.

 유대인의 신앙 대상인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괘씸죄에 걸려 체포되고 처형당하는 장면에 그의 제자 유다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님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모든 군중이 ‘호산나(“구원해 주소서” 를 외치는 승리의 환호)가 불과 며칠 후 바로 그 군중들의 입에서 살인강도인 바라바를 사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쳐대는 아우성에 못 이겨, 예수님의 무죄를 누구보다 잘 알던 로마정부의 총독 빌라도가 민란을 잠재우기 위해 예수님을 처형한 사건 현장인 것이다.
 유다가 예수님 몸에 뿌려진 향유에 대해 아까워했고 또 은 삼십에 스승을 파는 등 돈에 눈이 어둡다는 비난이다. 사실 유다는 우리나라의 안중근이나 윤봉길의사 만큼이나 당시 식민지 압제에 신음하던 유대민족에게 애국심을 품고 있던 목숨을 사리지 않는 열혈애국 단원이었다. 스승 예수님은 풍랑 심한 배 위에서도 편안히 잠을 자고 예수님 자신은 물 위를 걸을 뿐 아니라 걷다가 물에 빠지려는 베드로를 건져 올리거나 위기가 닥쳐도 늘 태연하고 병 든 사람이나 죽은 사람까지 살려 내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이적을 일으키지만 늘 위기가 닥친 극적인 상황에서만 그 이적을 행함을 보아 온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이야말로 메시아이자 그리스도인 스승의 위대한 능력을 한껏 발휘하여 로마 정권을 엎어버리고 만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잠재울 때가 온 것으로 굳게 믿었던 그였다. 그러니 자신(유다)에게는 그 계기를 스승에게 만들어 줄 때가 온 것으로 판단이 서자 스승을 적들의 손에 넘겨 준 것이다. 호산나를 외쳐대던 환희에 찼던 목소리가 실망으로 돌변하면서 강도(열혈 애국단원) 바라바의 사면과 예수님 처형을 요구하는 함성으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유월절 명절에 모인 유대인 군중들과 유다의 기대를 저버린 채 무력한 모습의 스승이 모진 고문 끝에 이적을 일으키기는커녕 순순히 처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자 한꺼번에 몰려드는 죄책감과 회한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린 것이다.
 유다의 돈에 대한 탐욕, 스승에 대한 배신 등은 늘 한국교회에 풍성한 설교 재료를 제공하고 있지만, 우리는 늘 안중근 의사 같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배신자 아닌 애국자로서의 유다는 한 번도 등장한 일이 없다. 성경 전문가인 목사들이 일반인인 필자보다 이런 사실들에 더 정통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인데도 말이다. 얼른 보기에 유다야 말로 나쁜 사람 중에도 가장 죄질이 나쁜 사람으로 되어있지만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할 말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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