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이런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코딱지만 한 우리 대한민국이 어떻게 오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외부의 큰 세력에 병합되지 않고 버티어 왔는지 신통하다는 얘기가 그 하나이다. 또 한 가지는 고려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우리 조상들이 쌓아 온 역사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나마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첫 번 째 얘기에 답하기에도 긴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서기 전 7,197년(지금부터 약 9,300년 전)우리 조상이 세운 최초의 나라 환국(桓國)을 시작으로, 배달국, 단군조선, 북부여, 삼국, 고려, 조선,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오는 긴 역사 속에서 아시아 대륙 반 이상을  다스렸던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은 차치하더라도 다소 약해지기는 했지만 삼국과 고려까지도 황제의 나라로 군림한 강한 나라였음을 빼어 놓았을 때 바로 그 ‘기적 같은 대한민국의 존속’ 얘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번째 얘기인 삼국사기에 대하여 좀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신라가 망할 때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부왕(父王)인 경순왕에게 절대로 고려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버티었으나 불가항력으로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하게 된다. 고려의 한반도 통일 후 마의태자는 경주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지금 강원도의 인제군 등지에서 군사를 모아 저항운동을 펼쳤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절감하고 지금의 만주 땅으로 흘러들어 후일을 기약하게 된다. 만주로 들어간 마의태자의 후손 아골타(阿骨打)가 나라를 세우게 되니(1,115년) 나라 이름이 금(金)나라이다. 당시에 발해(大震國)을 멸한 강국 요(療)를 격파한 금나라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지금의 중국 본토인 송(宋)나라 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강국으로 부상한 시기가 고려 인종 때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형제국의 관계를 맺고 화친하자’라고 나오더니 나중에는 군신관계를 강요하고 나섰다. 이 금나라가 수백 년 후 그들의 후손 누르하치의 후금(靑)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가운데 금나라에 사대를 해서라도 권력을 유지해 보자는 것이 김부식의 기반이었던 것이다. 고려 조정은 대대로 신라 왕족인 경주김씨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선 인물이 김부식이다. 한학자인 그가 남긴 업적 중에는 삼국사기 저술을 빼 놓을 수 없다. 귀중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공적을 깎아내려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유학자인 그는 자기 세력 유지를 위한 철저한 사대주의자였다는 데 변명의 여지가 없고, 이 삼국사기가 후대에 일인들의 식민지 침탈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겨레에게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시에도 우리 고려에도 수많은 역사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참고하지 않았고, 중국인들의 침략근성을 드러내면서 자기네들 마음대로 적어둔 각종 사서만을 기초자료로 사용하였으며, 삼국을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고 삼국 이전의 역사는 생략하고 사실상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였다는 이유로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제외한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는 신라가 사대를 하는 나라로서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한 것은 옳지 않았다고 지적하였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원인이 수. 당에 대한 불손한 태도 때문으로 지적하였으며, 백제가 전쟁을 일삼아 대국에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지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를 배제하는 철저히 유교적 사관으로 일관하여 중국의 고전과 고사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박학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방을 다스리며 중국을 제압했던 고구려를 ‘진나라와 한나라 이후 중국의 동북에 끼어 있던 작은 나라’로 깎아내린 것도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더 나아가 ‘수. 당의 국경을 침범한 고구려 때문에 한민족이 그들의 원수가 되었다’라는 원망까지 늘어놓고 있다. 몇 해 전 ‘주몽’이란 제목의 연속 사극이 보여준 것 같이 백제를 세운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가 아닌 것으로 주석을 달아 후세에 혼란을 안겨주기도 했다.

 더구나 강렬한 자주정신으로 당나라에 씻을 수 없는 패배와 수치를 안겨 준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을 ‘권력에 눈이 멀어 임금을 잔인하게 죽인 천고의 역적’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연개소문이 주군 영류제를 죽여 토막을 내서 구덩이에 묻었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실은 고구려의 27대 영류제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당나라에 굴욕적인 자세로 일관하였다. 영류제는 선왕들의 법을 모두 버리고 당나라에서 도교를 수입하여 강론을 하였다. 연개소문이 만류하는 간언을 올리자 언짢게 여긴 영류제는 대신들과 짜고 연개소문을 변방으로 좌천시켜 죽이려 하였다. 이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연개소문은 대신들을 열병식에 초대하여 모두 제거하였다. 변고가 생기자 영류제는 변복을 하고 몰래 달아나다가 송양에 이르러 병사를 모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따르지 않음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부식은 연개소문을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만들면서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늙기 전에 취하려 한다.’ 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 태종을 ‘현명함이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 극찬까지 늘어놓았다. 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한 이유를 ‘연개소문의 악행으로 고구려 백성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 대목은 중국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로 일관하고 보니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 역사의 계승 맥을 전면 부정하여 국통 맥을 혼란에 빠뜨린 소국주의 사서이자 극치의 반도사관 역사서라는 점이다.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 칠천 여년의 역사의 밑둥치를 잘라낸 것으로도 양이 차지 않은 일인들은 고조선의 변방인 변한을 한 때 기습 강점한 도적 위만의 집권을 우리나라의 시원역사로 잡아놓았고 지금의 우리 교과서가 이를 그대로 후대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역사의 기록이 외국인들의 손에 씌어져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니 잘못 되어 있는 대목은 즉시 바로잡아 놓아야 할 일이다. 일인들은 평양 이북의 땅을 한(漢)나라 통치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한강 이남의 땅을 ‘임나일본부’라는 존재하지도 않은 이름을 붙여 일인들이 통치하였다 하니 많은 부분에서 ‘삼국사기’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일정 때 맨 먼저 착수한 일이 기존의 이십 여만 권의 조선 역사서 색출과 소각이고 그 중 가장 식민지 정책에 이용하기 가장 좋은 사서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선택된 것이다. 일본 역사는 신화시대까지 억지로 잡아 늘어뜨려도 2,600년 이상이 될 수 없고 보니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역사마저 ‘반기 역사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이유까지 붙여가며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신라의 내물왕 때 나라를 세웠다느니 하면서 우리 역사를 일본의 절반인 1,300년 정도로 잡아 주거나, 후하게 2,000년으로 잡는다는 것이 앞서의 도적 위만시대에 이은 한사군 식민지 통치로 잡아주는 것이 일인들 멋대로의 역사서라는 말이다.
 때늦었다는 바로 그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이 있다. 지금 당장 다른 무엇보다 먼저 사서를 바로잡아 후대들에게 9천 여 년 전 세계 최초의 문명국가로 태동했던  환국(桓國)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오는 유구히 이어오는 빛나는 역사를 후대들에게 자랑스럽게 가르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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