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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분노[憤怒]와 탐욕[貪慾]에 덮이면, 자기와 남을 해치며 그러므로 근심하고 괴로워한다.( 막말을 하며 화를 내는 얼굴 모습이 악[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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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22  10:3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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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어떤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말라. 화는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한번 불 붙으면 꺼지지 않으며 나를 태우고 남도 태운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화내는 얼굴이 가장 큰 악이다. 당신은 활활 불타는 악인의 얼굴을 하고 싶은가?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책 생각이 났다. 커다란 뼈다귀를 물고 가던 강아지가 개울을 지나다 개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보다 더 큰 뼈다귀를 물고 있는 강아지를 보며 짖어대다 자신이 물고 있는 뼈다귀를 개울물에 빠뜨리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가 같은 손에 두개를  잡을 수 없음은 알지만 손에 잡은걸 놓지 않고 또 다른 것을 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에 이미 가지고 있는 걸 놓아버리고는 다른 것도 잡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평범한 진리를 왜 우리는 그리도 자주 잊어먹을까? 달마 스님께서는 인간에게 나타나는 3가지 독[毒]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삼독[三毒]은 탐욕 하는 마음(탐심:貧心), 화내는 마음(진심:瞋心), 어리석은 마음(치심:痴心)이며 줄여서 '탐·진·치(貪.瞋.痴)'라고 하셨다. 이 세 가지 독한 마음이 본래부터 온갖 악[惡]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지만 거기에서 생긴 가지와 잎은 무수한 것같이, 이 삼독의 뿌리가 낱낱의 뿌리에서 모든 악업[惡業]을 낸다.“ 라고 말씀하셨다. 삼독[三毒]은 사람의 선한 마음을 해치며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이라고 한다.
 탐욕은 탐애(貪愛)라고도 하며 본능적 욕구를 포함해서 탐내어 구하는 것, 즉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말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에 욕심을 내어 집착하는 것, 자기의 뜻에 맞는 일에 집착하는 것, 정도를 넘어서서 욕심을 부리는 것, 명성과 이익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5욕(五慾)이라고 하여 식욕(食慾)·색욕(色慾)·재욕(財慾)·명예욕·수면욕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구하는 것 자체가 탐욕이 아니라 그것이 정도를 지나칠 때 탐욕이라고 한다.
 진에(瞋恚)'는 뜻에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증오심이나 노여움으로, 탐의 이면에 있는 것으로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 혐오· 불쾌 등의 감정을 말한다. 산목숨에 대하여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에(瞋恚) 속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진에(瞋恚)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허물이 되는 것이며, 다스리기도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우치(愚癡)는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마음으로서, 탐욕과 진에(瞋恚)에 가려 사리분별에 어두운 것, 또는 지적인 번뇌를 말한다. 무지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무명(無明)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세상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세상의 참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으며, 그것은 고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치(愚癡) 때문에 모든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치(愚癡)는 모든 번뇌의 원천인 무명(avidya), 혹은 근본무명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구별되기도 한다. ​삼독과 근본무명은 상호작용하면서 강화된다.
 이와 같은 삼독[三毒]은 모두 나(‘아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아我’)’ 스스로에 미혹한 것이 우치이고, 그 우치(愚癡)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진에(瞋恚)를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삼독[三毒]은 사람을 생사의 윤회 속으로 빠뜨리는 근원이 되고, 인간의 고통을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았는데, 이 삼독[三毒]은 인간의 청정함을 해치는 것으로 인간의 숱한 번뇌를 압축한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이 삼독에 갇혀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탐, 진, 치를 극복해야 한다. 우선 탐욕 심을  버려서 청정심을 기르고, 성낸 마음을 없애 밝은 마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청정한 마음, 평화롭고 자비한 마음, 지혜롭고 밝은 마음이 우리의 본래의 마음임을 알고 삼독[三毒]을 극복하여야 한다. 탐욕[貪慾]은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한 번 타오르면 누구도 끌 수 없다. 성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성냄을 나타날 때의 얼굴 모습은 악마[惡魔]와 같으며 그 행동과 말씨는 그보다 더 악한 악[惡]은 없다. 그러므로 탐욕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야 한다. 탐욕은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이고, 매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망상이고, 남이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갈구이다. 분노의 바탕은 ‘저항’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저항이고, 허망한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데서 일어나는 저항이다. 싫다고 저항하는 게 분노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매사에 얼마나 성을 잘 내는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 탐욕과 분노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마음이 분노와 어리석음에 덮이면, 자기를 해치기도 하고 남을 해치기도 하며 자기와 남을 함께 해치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감정을 품게 된다. 또 탐욕은 눈을 멀게 하고 지혜를 없애며 지혜의 힘을 약하게 하고 장애가 된다. 분노와 어리석음도 그와 같다. 욕심[欲心]의 의미는 ‘어떠한 것을 정도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욕망이나 욕구를 뛰어넘어 욕심[欲心]에 사로잡혀 있다. 욕망[欲望]이나 욕구[欲求]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욕구는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고 욕망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인간은 욕구와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인간은 욕구에 만족 할 줄 모르며 그것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욕구를 모두 만족시켜주기 위해 힘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이 가족이든 이웃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상관없이 그렇다. 욕구의 특징은 충족시켜줄수록 더욱 커지고 부풀어져서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삶은 항상 불만을 갖고 있으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급급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옷 입고, 밥 먹고, 물마시고, 호흡하는 것을 끊임없이 연속해 추구하는 욕구적인 삶이다. 따라서 그 생명을 연장시키고 보호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재물과 권력, 명예를 탐하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도 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나를 어떻게 해 달라, 나는 무엇인가 하고 싶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의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들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명하나 유지하기 위해 온갖 것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욕구충족을 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은 본래 영원한 것이 아닌데 영원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생명이란 본래 취산(聚散)이다. 바다에 파도가 생겼다가 흩어지는 것,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 이슬이 맺혔다가 날아가는 것이다. 생겼다가 사라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다. 끝없는 욕구.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는 삶일까? 마음이 생기면 세상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세상도 사라진다. 세상의 모습은 나의 마음이 만든 것이다. 나의 마음이 바뀌면 세상은 바뀐다. 자각은 자기의 지혜로운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 사물을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있는 것이다. 나에게 보이는 현실은 내가 보는 현실이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사람마다 다른 현실을 보고 있다. 꿈꾸는 사람들이 각자의 꿈에서 꿈속 일을 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지혜로워야 세상을 지혜롭게 할 수 있고 내가 자비로워야 세상을 자비롭게 할 수 있다. 나는 변하지 않고 환경만 변화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불만은 다시 살아난다.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루려면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지혜롭고 자비롭게 변화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변화에서 얻어지는 행복이 자각의 행복이며 자비의 행복이다. 현대의 인간들은 물질의 충족을 위해 살아간다. 심지어는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물질적 이익이라면 어떤 짓이라도 하며 어느 곳이라도 달려간다.
 인간의 탐욕[貪慾]은 끝이 없다. 님 들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탐욕과 성냄을 되풀이하며 번뇌와 근심의 삶을 이어갈 것인가? 삼독[三毒]에서 벗어나려고 힘쓰며 평화롭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 것인가? 님 이 화 낼 때 거울을 보라. 그것이 님 이 그토록 바라던 행복의 삶을 판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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