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빨간 대낮에 어린학생들이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나를 째려보았다.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지난번에 읍내 새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모퉁이에서 중,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학생들 대여섯 명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교복차림으로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담배연기를 입과 코 구멍으로 연신 굴뚝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태양빛이 천지를 비추고 있는 새빨간 대낮인데도 말이다. 옆으로는 수많은 어른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표정을 살펴보니,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째려보는 것이었다. 필자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학생! 담배는 몸에 해로워” 라며 부드럽게 말하자, 그 말이 채 끝나가도 전에 코 방귀를 끼듯이 유행가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큰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정말 귀싸대기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그 어린학생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고 동정심마저 느껴졌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장래에 사이코패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렇다고 남의 귀한 자녀에게 매사에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누가 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줄 것인가? 그 순간 옆을 지나던 한 젊은이가 당연한 듯 “남이야 담배를 피든, 술을 마시든 말든 왜 간섭해요?” 라고 말하고는 필자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몹시 창피스럽고 부끄러웠다. 무얼 잘못한 것일까?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필자가 이런 광경을 경험하는 것은 한번 두 번이 아니다. 학생 인성교육이 실종된 생생한 현장의 모습이다. 현 시대에 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의 바른 심성을 위해 무얼 가르칠까? 궁금했다. 물론 독자들은 일부 학생이라고 하겠지. ‘인성이 갖춰지지 않은 지식인은 잘 길들여진 개와 같다.’ 라는 서양 명언이 생각났다. 작금의 시대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보편적인 모습이 되었고 자녀는 하나만 낳는 저 출산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원인으로 인해 사회생활을 배우는 시기인 아이들의 인간관계도 달라지고 있다. 집집마다 여러 명이던 아이들이 지금은 한명 뿐이다. 엄마와 아빠의 손 4개가 한 아이를 보살피고 있는 현실이다.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학교나 학원, 심지어는 직장 일까지도 부모들이 해결해 주기도 한다.

 학교가 모두 왕자와 공주로 자란 아이들이 모였으니 집안에서처럼 나만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이러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왕자와 공주처럼 행동하려는 아이들이 놀림감이나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복잡하고도 다양하며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들은 개인과 가족의 파괴는 물론 엄청난 사회적 문제를 끊임없이 발생시키고 있으며 당황스럽게 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교육적으로 접근해야 할까?
 인성교육은 한마디로 사람교육이다. 사람교육이란, 일반 동물의 습성과 구분되는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계획되어진 교육 프로그램이다. 교사는 사회적 교육여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생 인성교육에 대한 사명감을 방관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시대에 맞는 인성교육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현장에 시급히 적용해야 한다. 자녀의 말씨와 행위를 보면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자녀는 부모의 말씨와 행동을 직접 경험하면서 오랫동안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자녀의 인격형성에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잘못 형성된 인성의 습관이 사회와 학교 안에서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키며 교사들을 당혹하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심지어는 교사들에게 달려들고 반항하며 맞짱 뜨려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이 그 예이며, 그걸 학생인권이란 명분으로 두둔하려는 학부모의 행위가 그 결과이다. 학부모와 학생이 교사를 무시하고 폭행하는 시대에 교사들의 학생에 대한 인성교육은 가능하며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겠는가? 우리사회의 교사 천시 풍조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에 있었던 그런 예를 한번 살펴보자. 대구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학생의 장기간 무단결석, 흡연 등에 대한 교사의 교육활동에 불만을 품은 학부모가 학교를 방문하여 교사에게 폭행 및 폭언을 가한 사건이 있었다. 교사의 교육활동이 여실히 무너진 생생한 교육현장 상황이다. 이렇듯 학생, 학부모에 의한 폭행·폭언으로 학교현장은 교사의 자긍심과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으며, 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의 수업권 또한 침해 받고 있는 상황이다. 교사와 학부모는 왜 부딪히는가? 원인은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와 학생들의 자기중심적 사고 및 행동이 학교에서 교사에 의한 교육활동과 충돌을 일으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사회에 만연한 개인 이기주의에 의한 교원 경시 풍조가 더 큰 원인이라고 본다. 학부모에 의한 교사 폭행사건이 있을 때마다 교사들은 열정을 가지고 학생지도에 임하기가 어렵다. 이는 학부모와 학생, 교사 모두에게 손해일 수밖에 없다.
 충남 공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부모가 교사를 폭행해 광대뼈 골절 등 코와 눈 부위에 심각한 외상을 입었던 사건이 있었다. 심한 욕설을 하는 여학생의 생활지도 과정에서 학교에 찾아와 난동을 피운 것이다.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의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수차례 얼굴을 가격했으며, 심지어는 학교 기물을 파손하고, 가위와 칼을 교사에게 던지는 등 행패를 부린 것이다.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학부모들은 교사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열과 성을 다해 학생교육에 임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교육현장이 이러하니 어느 교사가 열과 성의를 다해서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매진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울산지역의 한 고등학교 교무실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해서 중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남학생이 교사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교사는 그 자리에 쓰러져 동료 교사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던 사건이다. 수업 중 교실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담임교사에게 휴대전화를 압수당하자 이를 되찾으려고 고함을 지르며 얼굴 부위를 갑자기 때린 것이다. 이렇듯 무너진 학교 기강과 추락하는 교권으로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물론 학부모들은 인권적 차원에서 학생을 교육 하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미성년자인 학생의 인권만을 강조한다면 학생 생활교육은 거의 불가능하다. 옳고 그름을, 그리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인권만을 내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녀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학부모는 교사 앞에서 잠잠해야 한다. 나서지 않아야 한다. 학부모가 교육현장에 깊이 개입할수록 학생교육은 어려워진다.
 옛날에는 가정이 어른 중심으로 돌아간 반면 요즘에는 아이 중심이다. 아이가 가정의 왕으로 군림하며 최대의 특혜를 받는다. 더구나 외동아이로 자라다 보니 남을 배려하는 것을 배울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더욱이 우리 아이만큼은 ‘최고’로 키우고 싶은 부모의 욕심에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족함 없이 해주다 보니 이기적이고 물질만능주의 아이로 자라게 된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많다. 과보호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잘못된 사랑이다. 과보호는 사랑이 아니라 자녀를 문제아로 만드는 것이다. 과보호가 왜 문제가 될까? 과보호는 자립심을 약화시킨다. 자립심이 없으면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 또 과보호는 이기적이게 된다. 가장 나쁜 것이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는 나눌 줄 모르고, 배려할 줄 모르고, 인내하지 못한다. 부모의 과보호적 양육태도가 부모에게는 애정과 관심으로 표현되지만 자녀에게는 부정적으로 인지될 수 있으며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과보호적 양육태도가 부정적 정서의 근본인 분노로 직결되고 자녀의 학교생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부모의 과보호적 양육태도로 인한 분노표현이 학교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찌되었던 학생 인성교육이 땅에 떨어졌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학교는 이런 현실을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현 시대에 알맞은 인성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이 시급하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우리사회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사라지고, 머릿속에 지식만 가득한 잘 훈련받은 야생 개들만 득실거릴지도 모른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야생동물의 왕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사회가 바라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학교교육의 본래목적인 홍익인간과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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