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때쯤 되면 자신이 인생의 어디쯤 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고령시대로 접어드니 우리지역도 노인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지역의 노인을 위해서 이 글을 쓴다.
 나이 65세가 넘으면 머리카락도 희어지고, 이빨도 빠지고, 기억력도 없어지고, 보고 듣는 것도 급격하게 퇴화한다. 이런 현상에 예외는 없다. 제 아무리 건강하다고 뽐내며 자신감이 넘쳐나도, 노인은 노인일 뿐이며 간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밤새 안녕!” 할 수도 있다. 머리염색을 하고, 화장을 하고, 몸매를 가꾸고, 보약을 때마다 먹고, 얼굴성형을 한다한들 그건 일종의 눈속임에 불과하며 노인의 마지막 붉게 물드는 단풍 색깔일 수도 있다. 나이가 이때쯤 되면 자신이 인생의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모든 늙어가는 현상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 한다면 그건 자신이 어리석다는 증거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나이만 먹으면 뭐하랴!” 질병과 질병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으며 근심걱정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데, 그러니 인생살이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노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생 공부에 대해서, 이 시대의 고매한 스승인 종범 스님의 법문을 안내하고자 하니 독자들은 한번쯤 새겨보았으면 한다.
 100세를 살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 시기 고집은 또 얼마나 센가?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오라고 해도 못 간다고 전해라. 내가 알아서 간다고 전해라.”라는 유행어도 있다. 염라대왕이 실직자가 될 상황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60대 이후 어떤 삶을 사는가?” 이것이 새로운 과제인 것이다. 잘못하면 새로운 재앙이 되고 잘하면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신 후 몸이 전부 사리가 되어서 시방세계 곳곳마다 사리탑이 세워진 것은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이라는 것이 과연 없어지기만 하는 것인가?” 대부분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회 활동을 많이 못 하는 것에 대해서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노익장이라고 해서 젊은 사람들처럼 마구 뛰기도 하고 또 활동을 왕성하게 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활동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을 통해서, 경제적인 재력을 통해서 노년의 의미를 느끼려고 하는 등 이런 것으로 노년의 의미를 삼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그냥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삼고(三苦)’라고 해서 빈곤, 질병, 고독 세 가지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빈곤과 질병과 고독을 경제력과 건강과 사회활동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정신적으로 ‘인생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 공부’ 없이 돈을 갖고, 건강을 갖고, 활동을 가지려고 하면 안 된다. 사실상 정신적인 깊은 체험이 없이 젊었을 때를 다시 재현해서 살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젊은 사람 흉내 내다가 큰 탈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100세 시대에는 특히 노년 시기가 늘어났기 때문에 ‘인생 공부’가 아주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인생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노자의 도덕경에는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곳이 햇빛이나 달빛이나 별빛이나 자연의 광명이며, 그리고 먼지나 물이나 흙이나 다 티끌인데, 세상에 있는 티끌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햇빛과 내가 하나 되고 티끌과 내가 하나 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노인의 지혜이고 인생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인생 공부’를 어떻게 가르칠까?“ 이 몸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몸의 머리카락이라든지, 손톱이라든지, 치아라든지, 피부, 근육이라든지, 뼈라든지 이런 것은 모두 땅으로 돌아가고 몸에 있는 온갖 수분과 혈액 등 인간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은 거의 다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체온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살피고 느끼며 가르치는 것이 인생 공부의 핵심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 몸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은 ”이 몸이 진실한 것이 없다, 무실(無實)하다“는 뜻이다. 이 몸은 무실(無實)하여 언제 죽을지 모른다. 몸이 이렇게 무실(無實)한데 그 몸을 위해서 재력만 유지한다는 것은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이것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 건강만을 위해서 활동하고, 경제적인 준비만 하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인생이 100세라고 해도 10대도 20대도  40대도, 50대도 번개같이 지나간다. 60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허망(虛妄)하고 무상함을 절실하게 바라본 것이다. 허망하고 무상(無常)하다는 인생 공부가 없으면 고통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 몸에 계속 집착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고고한 지혜란 무엇인가? 바로 ”인생은 늙는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놈이다. 죽는다고만 알고 죽는 줄 아는 놈을 모르는 것을 망상 집착이라고 하고 악지악각(惡知惡覺)이라고 한다. 늙는 것을 알고 죽는 줄 아는, 아는 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아는 놈을 아는 것을 선지선각(善知善覺)이라고 하는 것이다. 늙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늙음을 아는 무엇이 있는 것이다. 요즘 심리학에서도 세계는 인식이 있은 이후의 현상이라고 한다. 인식보다 먼저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늙음이 있다고 하면 그 늙음을 젊게 한다든지 못 늙게 한다든지, 늙는 것만 집착할 뿐 늙는 것을 아는 놈을 잊어버리게 된다. ‘화엄경’에는, 밖으로 온갖 것, 검은 것, 흰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큰 것, 작은 것 등을 화가가 그린 그림 현상에 비유하고 있다. 어떤 그림이든지 그 그림은 붓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붓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생각을 말한다. 화가의 생각이 붓끝을 움직이고 붓끝에서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을 그려도 화가의 마음이고 그림을 안 그려도 화가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그림 평을 할 때 화엄경을 기준으로 하면, “그것은 화가의 생각이다.” 이렇게 하면 딱 끝이다. 여기서부터 불교의 마음공부, 불교의 인생 공부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허망하고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런데 허망하고 무상(無常)함을 아는 마음이 있다, 허망하고 무상함을 아는 마음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해탈(解脫, moksha)이다.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죽음과 내일 중에 어느 것이 더 빨리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말의 깊은 의미는 인간은 좀 더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목숨이 하도 무상하고 허망하여 빨리 생겼다 없어지는 것이 마치 번개 불과 같다.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결과는 슬픔이요, 통곡이다. 이런 것을 잘 살펴 본 사람만이 인생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 마음공부인데, 생각을 내서 판단하고 해석하고 서술하는 것을 마음공부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마음 공부한다면서 책부터 들고 온다. 마음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무서워하면 무서움을 느낀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조견(照見)이라고 한다. 또 밖으로 펼치는 생각의 빛을 돌이킨다고 해서 회광(回光)이라고 하고 또 돌이켜서 비춘다고 해서 반조(返照)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일체 두려워하는 생각, 좋아하는 생각, 싫어하는 생각이 하나도 없이 조용해지고 깨끗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청정해지는 것이다. 적적(寂寂)해지는 것이다. 소리도 없고 빛깔도 없다. 그렇게 들어가면 바로 들어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안 해봤기 때문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반복하며 밖으로만 보고 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는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 내면을 보는 것을 섭심내조(攝心內照), 마음을 거두어서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보면 생각이 아무것도 없이 고요해진다. 고요해진 마음이 더 깊어지고 깊어져서 극에 이르면, 밝고 밝아서 보지 못하는 데가 없다는 것이다. 청정함이 깊어져서 극에 이르러 세간을 보면 마치 꿈속의 일과 같은 현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마음공부의 최상의 단계이다.
 더 늙어서 육신이 병들고 마음이 흐려지기 전에 도달해야 할 노인의 마지막 인생 공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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