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가 장 형 갑
 전 이학렬 군수가 내세운 고성공룡 캐릭터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옛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이다. 이것은 보수주의의 정신이자 빛이다. 한문의 본질적 제약으로 달리 해석되긴 하나, 2천5백 년 전 공자가 제시한 교육과 배움의 근본자세(根本姿勢)로 새 것을 제대로 알고 배우자는 것이다.

 옛것을 열심히 읽고 익힌 다음 새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과, 옛것을 읽고 연구하면 새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 있고, 위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었다는 뜻이 있다. 서로 모순되는 뜻이 아니기에 모두 옳다고 봐도 무방하다.

 좌우간 새로운 것을 제대로 알려면 옛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옛것을 모르고 새것만 배우게 되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바다 위의 조각배같이 좌표를 잃게 되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즉 옛것이 없으면 근본도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새것은 헌것에 대한 비교 개념이기 때문에, 새것을 배워도 헌것을 모르면 어떤 점에서 왜 새것인지를 알 수 없다. 헌것 없는 곳에는 새것도 있을 수 없다. 헌것을 모르는 자에게 새것이 떠오를 수 없고 발견될 수도 없다. 따라서 자신의 뿌리를 헌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학에 인지주의(認知主意)이론이 있다. 어떻게 인지(認知)하고 어떻게 인식(認識)하느냐에 따라 대응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령 공룡엑스포를 변화와 경쟁력을 통한 고성발전의 미래포석(未來布石)으로 인지하느냐, 이학렬 개인 영웅심에서 나온 모험으로 인식할 것인가에 따라 정책대응(政策對應)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역사의 교훈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주장이다. 동일한 현상을 어떤 측면에서 볼 것인가는 과거교훈(過去敎訓)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과거에 관한 지식이 좌우한다는 정치인들의 필독서적인 이론이다. 

 과거에 얻은 인지는 현재 인지의 기반이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역사교육(歷史敎育)은 그런 뜻에서 모든 정치의 기초이며 출발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자동차를 만드는 새 기술도 먼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자동차 기술의 발달사를 배워야 새것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소위 새치기 모방(模倣)이 빠르게 고급기술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기대는 저버리라는 것이다. 한·중·일이 최첨단 기술에서 고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학기술에는 왕도가 없다고 한다. 서양이 개발·실험·축적한 과거의 기술을 우리가 되풀이 경험하고 자기화하느냐에 따라, 빠르게 독자적 새 지평선(地平線)을 개척(開拓)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지식은 현재에 관한 지식의 기반이고 새것을 아는 기준이다. 과거 안에는 현재가 잉태(孕胎)되어 있다. 모든 발명(發明)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發見)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발명은 어떤 형태로든 이미 우주 안에 잠재적으로 있는 것을 인간이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졌을까. 상대성원리 같은 지식은 물론 원자탄이나 컴퓨터도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창조 능력이란, 인간 지성의 오만(傲慢)에서 나온 하나의 수식어에 불과하고, 인간에게 있는 것은 옛 것을 배움으로써 새것을 찾아내는 발견의 능력이 있을 뿐이다.

 옛것과 과거의 것에서 지식의 원천(源泉)을 찾는 보수주의자는 자연히 지적(知的)으로 겸허(謙虛)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겸허의 덕을 중요한 보수주의적(保守主義的) 덕(德)의 하나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또 있다. 그 안에는 우리조상들의 경험(經驗)에서 나온 지혜(智慧)가 축적·응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참된 지혜와 가치는 오랜 전통 속에 담긴 보편적이고 불변한 항구적 지혜와 가치를 배운다는 뜻이다. 전 이학렬 공룡군수가 ‘온고지신’을 캐릭터로 내세운 것도 그 속에 내포된 깊은 뜻의 함축(含蓄)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온고지신은 보수주의의 정신이자 빛이다.

 혁신(革新)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신의 뿌리 도끼질인 과거청산(過去淸算) 속에 깔려 있는 위선(僞善)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깊이 사고(思考)할 때다. 세월이 갈수록 전 이학렬 군수에게 미안함과 존경심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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