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놈들 보다 더 잔혹한 방법으로 동족을 학살한 친일파와 테러집단인 서북청년단의 만행과 실체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이념논쟁이 끝난 지 반세기의 세월이 훌쩍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사회에 빨갱이 타령을 하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게 서글픈 일이다.
 지금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경제논쟁이 치열한 시대이다. 경제적 이익을 위한 보호무역주의와 강대국의 관세장벽이 판을 치는 시대에 보수가 뭔지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들이 국정농단 정치꾼들의 색깔논쟁에 휩쓸리고 있는 인생이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무섭기조차 하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남북평화통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은 남북평화통일이 왜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간판 뒤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며 대립과 전쟁과 적대감으로, 나와 이념과 생각이 다른 이는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습성이 있으며, 무차별 파괴하거나 죽여도 좋다는 생각이 뼈 속까지 스며있어 타협과 공존과 평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평화통일을 부르짖는 것은 우리국민에 대한 기만이요. 속임수다. 빨갱이라는 이념적 잣대로 상대방을 난폭하게 다루어야 하는 권리는 누구에게라도 없는 것이다. 이념 논쟁의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 4.3양민 학살 사건이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비참한 역사 이야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봄으로써 이념논쟁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추악한 괴물인지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아울러 반공이념이란 가면을 쓰고 4.3사건에서 제주도민을 무차별 학살한 비참한 살육 사건을 절대 잊어서도 안 되고 절대 용서해서도 안 되며 남녀노소는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대 살육을 자행한 이승만과 그 홍위병인 서북청년 테러 집단과 친일파 일당들을 기억해야한다.
 서북청년단 테러 집단의 실체와 만행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자. 지금부터  70여 년 전에 일어난 제주 4.3사건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만 가지고 봉기한 200여명의 젊은이를 무찌르기 위해 최소 3만 여명의 제주도 양민을 살상한 것이 바로 4·3사건의 핵심이며, 반공이념으로 누명 씌우진 빨갱이라는 사람은 아예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무서운 야만주의가 저지른 한국 근대사의 대 학살극 사건이다.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찍힌 채 자행된 대량 학살과 인간성 유린은 우리 민족의 최대 참극인 6·25 전쟁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만도 제주 도 인구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3만여 명 이상이었는데 이는 6·25 전쟁 당시 희생당한 남북 한국인의 비율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제주도4·3사건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제주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광복 직후의 제주는 25%라는 전국 최고의 인구 변동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돌아온 사람들은 일본에서의 치열한 삶 속에서 일정한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 중에는 대학 교육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제주도민들에게는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광복'을 뜻했다. 광복을 맞았기에 제주도민의 감회는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고 민족 독립 국가 수립을 촉구하는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시위 후 구경을 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6명의 사망자가 초등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장년의 농부 등 대부분 시위를 보던 군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들은 격분하였다. 그러나 군정 당국은 이 발포를 정당방위라 주장하면서 민심 수습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1월 21일 "제주도, 전남사건을 완전히 발본색원하여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제주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밝힌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특히 군ㆍ경 토벌대의 주축 병력이 돼 국제적으로 금지된 '초토화 작전'을 구사하는 등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을 섰으며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영문도 모르고 있던 주민들을 사살하였고 빨갱이로 몰아 집단 학살하는 일이 잦았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는 일이 잦았다. 친일파들이 저지른 폭거였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본토에서 온 경찰과 서북청년단(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단의 탄생)이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 고문을 했고 심지어 금품을 갈취하기 위하여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내는 등의 백색 테러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횡포가 심해 도민들은 산으로 피신했고 그 결과 무장대 세력이 더욱 커져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1948년 12월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라는 조직은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연행한 후 죄의 유무도 묻지 않고 모조리 총살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이 대조시켜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는 집을 골라내어 '도피자 가족'이라고 몰아 집단 학살했다.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으면 토벌대는 그 부모, 형제를 대신 학살했다. 이것을 '대살'이라고 불렀다. 3만 여명의 무고한 양민이 죽음을 강요당한 제주 4·3은 단순히 제주 지역사로 치부될 수 없는 대사건으로 현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이다. 친미 반공 국가를 구축하려고 했던 미국과 미국이라는 외세에 기대어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이승만 세력에 의해 제주도는 냉전 체제의 희생양으로 철저하게 짓밟혔던 것이다. 실로 3만 여명이란 숫자는 통계 수치로는 간단할지 모르나, 한 사람 한 사람 그 가족의 아픔과 함께 가슴으로 다가간다면 이러한 대량학살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대량학살을 자행한 반인륜적 세력이 바로 친일매국 세력과 이승만의 홍위병인 서북청년단의 테러조직이다. 서북청년단의 실체는 이북에서 일제시대 일본경찰과 장교와 고위관직으로 있으면서 조선 사람을 못살게 군 친일파 매국노와 가족들로, 친일파 매국노를 북한에서 처벌하자 남한으로 도망 온 후 미국과 그 앞잡이인 이승만 정권에 기생하며 미국의 분단정책을 반대하고 민족의 단결을 외치던 애국지사와 독립군을 암살과 테러를 가하고 제주4.3사건과 6.25때 엄청난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으며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악행을 저지른 반민족 매국노집단이다. 서북청년단은 함북과 황해. 평안남북도 출신으로 구성되었던 극우단체를 말한다. 단원 중 상당수가 친일 악질자본가와 지주와 친일부역자로 북쪽에서 진행된 인민재판을 피해 월남한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패망 후, 북한 지역은 소련이 점령하여 공산권이 친일청산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개신교 신자는 신변에 위협을 받게 된다. 그들은 친일파 지주에 예수쟁이로 목숨을 보장 받기 힘들게 되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온다. 친일파로 변절한 자들이 결성한 단체가 서북청년단이다. 이들은 악랄한 극우테러리스트로 살인과 폭행, 겁간과 고문을 다반사로 저질렀다. 친일경찰의 앞잡이가 되어 숱한 양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했던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남해의 다도해 지방과 제주도 등지로 진출하여 친일경찰의 위세를 등에 업고 이른바 자신들의 친일경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를 좌익으로 모는 빨갱이 사냥에 몰두했던 것이다. 서북청년단이 적으로 노린 대상은 일제시절의 민족주의자와 항일운동가, 독립 운동가도 좌익으로 몰았다. 친일파 일당이 항일투사를 검거하고 살해하는 적반하장의 세상을 맞은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특히 군ㆍ경 토벌대의 주축 병력이 돼 국제적으로 금지된 '초토화 작전'을 구사하는 등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을 섰다.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영문도 모르고 있던 주민들을 사살했으며 빨갱이로 몰아 집단 학살하는 일이 많았으며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는 일이 잦았다. 제주도 4.3 사건에서 언급되는 토벌대로 불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대나 경찰이 아니라 이 서북청년단이라는 테러조직이었다. 정치적인 지지기반이 필요했던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인 배후조직으로 양성했던 소름끼치는 테러조직이었던 것이다.(출처: 백과사전)

 수많은 북한 청년들, 그 중에서도 기독교 청년들이 빈손으로 38선을 넘어 왔다. 가진 것이라고는 두 주먹과 공산당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밖에 없는 이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평안도 출신들 뿐 아니라 황해도, 함경도 등 이북에서 살다가 넘어온 사람들도 몰렸다. 가장 비기독교적인 학살을 자행한 기독교인들, 그들이 하는 일은 사실 경찰이나 군대가 하기 힘든,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을 도맡으면서 동시에 그 적개심을 빨갱이에게 털어놓는 일이었다.  서북청년단은 자신들이 박해받고 배신당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증오를 합리화했고 그를 반공과 결부시켜 나아갈 바를 삼았으며 그 나아가는 길에 널린 모든 방해물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애국으로, 신앙으로 생각했다. 서북 청년단은 개신교 조직폭력배로 해방이후 북한에서 쫒겨온 감리교가 주축이 되었고 남한의 개신교가 가담하고 YMCA 에서 창단식을 가진 전국을 무대로 한 거대 폭력조직으로 정치적 테러 행위를 일삼고 방화 강도 절도 등등의 패륜적 행위를 하였으며 그들은 자신을 반공 용사라 칭하며 사람 죽인 일을 공산당 때려잡는 일로 미화시키고 목회 활동을 하였다. 개신교인들은 정말 제주도민에게 백배 사죄해도 모자란다. 그럼 이들을 학살한 주체가 누구일까? 바로 미국정부의 조정을 받고 미국 개신교 교단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 독립 운동한 민족주의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려고 만든 단체인 서북청년단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서북청년단만큼 악마적인 단체도 없었다. 이들이 비공식단체이기 때문에 월급이 없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다녔다. 주로 군과 경찰을 따라다니며 빨갱이 색출 작업을 벌이며 부녀자 강간, 이승만 초상화나 태극기 강매, 반반한 여자는 자기 마누라로 삼고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약탈과 살인을 밥 먹듯이 한 단체다. 서북청년단은 주로 이북의 지주나 개신교인들로 구성된 극우반공단체로 이북에 공산정권이 들어서 토지를 무상분배하고 종교를 없애자 남하한 사람들이었다. 개신교인들은 이데올로기를 떠나 예수의 사랑을 믿는다면서 제주도민을 이렇게 학살한 역사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순박한 사람들의 가슴에 죽창을 박으면서도 ‘하나님!’을 부르짖었고, 죽인사람을 불태우면서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서북청년단은 자신들이 박해받고 배신당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증오를 합리화했고 그를 반공과 결부시켜 나아갈 바를 삼았으며 그 나아가는 길에 널린 모든 방해물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애국적 신앙으로 생각했다. 종교가 이념화되면 정말 무서운 테러단체로 변질되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태극기부대라는 단체가 나타나 이 나라를 종북 세력으로 부터 지켜내기 위한 우리의 저항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그들은 불의한 공권력에 맞서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로서 할 수 있는 선택 중 가장 폭력적인 하나를 실행할 것이라며 정부를 향해 협박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판 서북청년단의 출현이라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며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얼치기 반공 꼭두각시의 무지한 인간들이 하루 빨리 우리사회에서 사라져야 하며,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사이비정치꾼들을 국회에서 쫓아내야 할 책무가 우리국민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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