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3.15 부정선거의 부끄러운 역사 이야기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우리지역 국회의원은 부패문제로 법률에 의해 의원직을 상실당하고 4월이 되면 그 빈자리에 보궐선거를 통해 다시금 국회의원을 뽑아야 하는 희극이 연출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고 이런 분을 다시 뽑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을 배출시킨 정치단체는 군민들에게 사과문이라도 발표하는 것이 예의임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며 다시금 후보자를 내는 모습은 너무 뻔뻔스럽다. 우리지역 군수도 마찬가지다. 4년 임기동안 부패, 부정으로 2명이나 물러난 정치세력을 또다시 선택했다면 그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을 것이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과대 공약이나 아름다운 말로 군민을 유혹하는 국정농단 패거리 정치꾼을 다시 국회의원으로 뽑는다면 이것은 고성군민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주는 문제다. 이런 모습들을 보노라면 선거철만 되면 자유당에 의해 저질러진 황당한 부정선거 이야기가 머리에 떠오른다. 민심이 무지했던 시절에 폭력처럼 저질러졌던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해 본인의 주장이 아닌 ‘백과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싣고자 하니 독자들은 잘 살펴보고 부정선거가 국민과 국가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엄청났는가를 되돌아보길 바란다. 부패한 정치세력은 부정과 비리를 엄청나게 저질러서 그들만의 권력유지와 이익만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은 1960년 3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승만 후보를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과는 부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 선거는 결국 부정선거로 밝혀졌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게 되었고 무리한 개헌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자유당에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것이다. 결국 이에 분노한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자유당 소속 정치 폭력배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선거는 결국 국회에서 무효 처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과 이기붕은 각각 대통령직과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제1공화국의 붕괴 원인이 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문맹률이 90%에 이르렀지만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라고 생각해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나서 의무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의무교육을 통해서 실시하고, 각 반에서 반장과 부반장을 직접 뽑는 것을 통해서 어린 학생들이 몸소 체험하게 한다. 10년이 지난 후 민주주의를 배운 이들이 4.19 혁명을 일으키는 주역인 학생들이 된다. 이에 나중에 이승만은 이렇게 평가했다. "국민들이 잘못된 것을 보고 항의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국민이다. 학생들아 잘 하였도다." 국민에게 땅을 주고, 양반과 상놈의 차별과 남녀차별을 없앤 이 당시 이승만의 인기는 아주 높았다. 이승만의 인기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자유당의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게 되며 권력에 야욕을 보인 자유당 당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누리고자 한다. 건국초기에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두 번까지 할 수 있으나 자유당은 자신들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헌법을 바꾸고자한다. 헌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2/3 이상의 표를 얻어야 한다. 이 때 총 203표가 있었고, 2/3는 135.33... 이다. 실제로 135표가 나왔지만 사람을 소수로 나눌 수 없고, 2/3 이상이므로 135표이면 통과이다. 라고 주장하고, 어거지로 헌법을 바꾸게 된다. 바꾸게 된 내용은 2선이 아니라 계속 재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당 후보에는 이승만(대통령)과 이기붕(부통령)이 나오고, 민주당에서는 조병옥(대통령)과 장면(부통령)이 나왔다. 조병옥에게는 지병이 있어 선거 전 사망하게 되어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다. 이 때 이승만의 나이가 86세이었다.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되고, 부통령으로 장면이 된 후 나이가 많은 이승만이 죽게 되면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장면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정권 교체가 일어나며 실제로 이승만의 나이가 많으므로 가능성이 있는 스토리였다. 이에 권력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자유당에서 부통령을 차지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부정선거 계획을 짜게 된다. 1960년 국무 회의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비밀로 하고 악한 계획을 짠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법으로 규정된 날보다 앞당겨 대선을 치르기로 하였고 한편으로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을 원했으면서도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경선을 치르게 되었고 이승만이 1위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다른 측근들은 이기붕의 출마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부통령으로 출마하기로 한다. 이들은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한편, 조선민주당의 역시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며 부통령 후보로 각각 출마하였다. 한편 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고 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의석수를 훨씬 더 얻는 등 사실상 조금씩 권력을 획득한 민주당은 이러한 자유당의 계획에 맞서기로 한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자유당보다 5개월 늦은 1959년 11월 26일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통해 각각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유당에 맞서게 되었다. 두 정당(자유당, 민주당)은 어떻게든 서로 이기고자 선거 운동에 몰두하였는데 상황이 1956년 때와 비슷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1960년 2월 25일 하와이에서 신병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이번에도 단독후보가 되었다. 그동안 자유당은 민주당과 대결해야만 했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갑자기 죽었으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자유당은 이 틈을 노리게 된다. 이 틈을 노리게 된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짜게 된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 운동망을 조직한다.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독찰하도록 한다. 위의 두 가지 방법 이외에도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승계를 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밖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 공개 투표를 계획한다(예: 사람들이 단체로 지나가면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그들에게 "자유당인 거 잊지 마라" 등의 말을 하는 것). 완장 부대를 활용한다(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누구 찍어야 하는지 알지" 따위의 말로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지라고 협박하는 것).투표가 시작되기 전에는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진 가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넣는다. 야당 참관인은 투표하는 장소에서 추방시킨다. 이 모든 것에는 경찰이 가담하였다. 그러자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라고 호소하였지만, 깡패들이 "사실을 해명하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3월 9일과 10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에 대해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가 하면, 한 명 당 투표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 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은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러자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내무부 지방 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다. 27일 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그렇게 온갖 부정이 치러진 결과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17.5%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여서 당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부정 선거라는 사실이 들통 났고, 선거 이튿날인 1960년 12월 16일 옛 광양 등지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투표함을 확인하던 중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자 급기야 투표함을 불에 태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부정 선거라는 사실이 들통 났고, 선거 이튿날인 1960년 12월 16일 옛 마산 등지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투표함을 확인하던 중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자 급기야 투표함을 불에 태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위가 지속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했다"는 말을 꺼내며 폭력적인 진압을 강행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한편 학생들까지 시위를 일으키자 이들도 죽어나갔고, 서울에서도 심심찮게 데모가 일어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에, 정치 깡패들이 그들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이승만은 인기가 땅에 곤두박질치는 등 그야말로 몰락했다. 순식간에 이승만은 인기가 땅에 곤두박질치는 등 그야말로 몰락했다. 1960년 12월, 옛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으로 발견되자 시위는 격화되었다.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끝에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르기로 약속했으며 얼마 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뒤 본인의 젊은 시절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던 하와이로 갔다. 제1공화국은 결국 붕괴되었으며 대신에 내각책임제를 바탕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 뒤, 국민들은 총선을 통해 민주당을 집권시켰다. 하지만, 1년도 채 못 가 ‘박정희’가 일으킨 전국규모의 5.16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야 만다. 한편, 이승만은 제3공화국이 출범하고도 귀국하지 못한 채, 1965년 미국에서 91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귀국하지 못한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외교관을 보내어 오지 못하도록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3.15는 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효시로 그 숭고한 정신의 계승을 위해 4.19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별도로 국가기념일로 반드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김영삼’ 등의 적극 주도로 3.15 기념일 제정 사업이 추진되었다. 마산지역 의원들은 국회에서 세미나를 개최, '3.15의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국가기념일 제정의 당위성' 토론회를 열었다. 그러나 3.15 기념 계획은 보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 엔 국립 3.15 민주묘지가 있는데, 이 곳은 이 사건 및 4.19 혁명 관련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4.19 희생자들을 기리지만 3.15가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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