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36년간의 민족적 설움과 일제 앞잡이들의 반역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곧 3.1절이 다가오니 기념행사다, 태극기를 달자. 뭐다 해서 야단이다. 그런 요식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며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누구인지, 일본에게 누가 어떻게 협조했는지, 어떤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 알아야 하며 현재에도 친일 매국행위를 하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할 때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제36년의 역사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은 을사보호조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왜놈인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일본에 나라를 팔아먹는 회의에서 그것에 찬성했던 다섯 명인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가리킨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는데 앞장선 자들로, 한일합병 후 을사오적은 모두 일제로 부터 귀족작위를 수여받았다.) 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로 체결된 조약.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무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어 각종 반대운동에 일어났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을사보호조약의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 체결 당시의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었으며, 을사년(乙巳年)에 체결되었다고 하여 '을사조약', 또는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찬탈하고 보호하기로 했다는 뜻에서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을사늑약'이라는 명칭은 이 조약이 강압적인 상황에서 불평등한 내용으로 체결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관인을 일본 관리가 훔쳐 찍었고, 협정에 임하는 양국의 대표에 대한 양국 통치권자의 위임 절차가 결여되었으며, 한국 고종 황제가 비준을 거부하고 이 조약이 무효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천명하였다는 점 등을 들어 불법적이며 원천 무효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러시아로부터도 마침내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정말 치욕적인 우리나라의 근대사이다. 열강들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保護國化)에 대한 승인을 얻어낸 일제는 이어서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한국의 보호국화에 관한 기본방침을 확정한 것은 1904년 5월 31일의 내각회의에서였다. 내각회의에서 한국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 장악, 그리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 등을 통한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 앞서 이미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2월 23일 일본군 1개 사단이 서울에 진주하며 위협을 가하는 가운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施政改善)에 대해 일제의 충고를 허용한다.'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의 길을 열었다. 그 후 한일의정서 시행세칙을 내세워 군사행동과 토지의 점령·수용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며, 8월 22일 제1차 한 일 협약서를 체결하게 하고, 군사·재정·외교 고문을 파견했다. 1905년 2월에는 협정에도 없는 경무 고문과 학부 참여관을 파견하여 한국의 내정을 장악해 나갔다. 이 같은 정지작업을 거쳐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국을 보호국 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 체결은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고,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고종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이토는 11월 17일 한국정부의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보호조약을 승인하게 했다. 일본 군인들이 무력시위를 벌이는 공포분위기 속에 열린 이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다시 궁중으로 회의장소를 옮겼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하야시[林權助] 공사는 이토를 불렀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찬성했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동한 5대신(五大臣: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을 강제 체결했다(을사오적). 그 내용은 제1조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영사는 외국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 통감(統監)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지고,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해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었다.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2월 21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고, 초대 통감에 이토를 임명한 데 이어, 1906년 1월 31일 주한일본공사관을 비롯한 각국의 영사관을 철수하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공사에 착수했다. 또한 조약에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하기 위해 경성에 주재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1906년 3월 2일 통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한국의 유신을 위한 시정개선의 자문에 관한 고종의 의례적 부탁을 들어 자신이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한 주요급무들에 관해 각 대신들과 협의 결정하여 국왕의 재가를 거쳐 시행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906년 3월 13일부터 통감관사에서 한국정부의 참정대신 이하 각부 대신이 참여하는 '한국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수시로 열어 이를 주재하면서 사실상 한국의 내정을 총지휘하기 시작했다.(참조: 다음백과) 이렇게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면서 민족적 비극인 일제36년의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매국적 잔재가 남아서 친일 매국행위를 하고 있으니 정말 어리석은 민족이라고 지탄 받아도 변명할 이유가 없어진다. 2018년도에 보수기독교계가 주최한 “3.1절 구국기도회 및 범국민대회” 뒤끝이 소란스러웠다. 동영상을 보아하니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보수기독교계의 목사란 사람들이 대거 출동하여 “앞으로 반일은 안 된다. 친일을 통해 한미일 동맹으로 나가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것도 3.1절에 말이다. 어디 친일발언 뿐인가? 이들은 하나같이 지금 대한민국이 빨갱이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며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등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왜 이리도 친일을 부르짖고 난리일까? ‘명박. 근혜’가 이 친일 성향이어서? 물론 ‘명박. 근혜’ 정권의 뿌리 깊은 친일 성향이야 익히 알려진 그대로다. 단순히 ‘명박. 근혜’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으니 그 둘을 구출해내기 위해서? 사실 보수기독교계의 친일행각은 지금보다 일제 강점기에 극을 달했다. 물론 일제하에서 친일을 하지 않은 종교계는 드물었다. 개중 일부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민족주의적 활동을 벌인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친일행각의 큰 흐름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를 구별할 수조차 없이 일반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조계종 종무총장의 비행기 헌납 독려, 승려 징병 파견. 가톨릭 주교의 ‘황군무운장구 기도회’ 등 개최이다. 각 종교계는 경쟁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국방헌금을 헌납하고 징병을 독려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통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고 확장시켰다. 심지어 기독교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성서적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38년 장로회에서 일본천황의 사당에 신사참배를 하기로 의결했고, 1942년 기독교신문 사설은 “현재 국민으로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봉공의 하나는 금속류 공출이다. 당국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헌납에 성의를 다하자”며 교회 종 1,540개를 헌납하기까지 했다. 이것도 모자라 1944년 4월15일 기독교 신문은 '거듭 보국기 헌금운동에'라는 사설에서 “비행기 헌금을 만든다고 하면서 교회재산을 팔아 버린 후 목사 퇴직금이나 주택이니 무슨 경비니 이름 지어서 다 제하고 나머지 부스러기만 비행기 헌금을 내놓는 것은 반대한다.”며 “일본국에 모든 재산을 바쳐야 한다.”고 거품을 물 정도였으니 경악할 노릇 아닌가? 이랬던 기독교가 해방이 되자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해방이후 기독교는 자신들의 자발적인 친일행각에 대해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사랑으로 허물을 감싸줘야 한다.”, “지금은 친일파보다 빨갱이를 잡는 게 더 급하다”며 기독교 장로인 부패한 독재자 이승만과 결탁했다. 그리고 4개월 만에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면서 친일청산을 매장시키는 반역사적 쿠데타를 저질렀다.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기독교계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곳이 황해도, 평안도 지방, 즉 서북지역이었는데 친일청산 과정에서 재산이 몰수되는 등 지주들과 함께 교회가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류가 되었다. 이 세력들이 월남하면서 한국전쟁 시기에 서북청년단으로 조직되어 반공을 기치로 내건 극우 백색 테러집단이 된다.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에 결탁해 청산을 피해나가고, 이후 군부 독재정권에 이어 명박. 근혜 정권까지 끊임없이 권력과 한 몸이 되어 몸집을 키워왔다. 이제 보수기독교계는 친일에 ‘숭미’를 더하며 남북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체제 자체를 반대하며 오로지 미국의 이익에 복속됨으로써만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신념으로 이념대결을 불사하고 있다. 그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공산주의 개헌반대, 한미동맹 강화, 자유민주 수호, 문재인 퇴진”4가지 주제였다. 기도회에서 그들은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와도 싸워서 이겼고, 공산주의와도 싸워서 이겼다. 감히 우리는 건드리면 파멸뿐이다.”라며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가리고, 외려 찬양했다.
 결국 이들이 친일을 부르짖는 이유는 자신들의 태생과 존재기반을 지켜내고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한 것뿐이다. 친일청산은 그들에겐 자기부정이자 자해일 뿐이다. ‘명박 근혜’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끊임없이 권력과 한 몸이 되어 기득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그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결사항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남북분단과 전쟁위기를 파먹으며 살아왔고, 또 성장해왔다. 그러므로 그 분단과 남북대결이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며, 무진장한 위기를 양산해낸 ‘명박. 근혜’ 꽃 시절로 되돌리고 싶을 뿐이다. 반대로 민중들의 삶과 민주주의는 분단체제로 인하여 고통 받고 왜곡되어왔다. 그들이 말하는 위기가 결국 자신들의 탐욕의 위기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들의 위기감이 깊어질수록 더 과격해질 것이며 그로인해 더 고립될 것이다. 앞으로 보수기독교계가 얼마나 더한 막말과 정신분열적인 행위들로 소식을 전할지 한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기대된다.(참조: 2018.03 .3.1절 구국기도회.) 이들은 망국적 행위를 중단하고 그들의 신에게 돌아가서 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힘쓸 때다. 대개 이러한 앞잡이들은 피지배 계층과 동질성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그 동질성 때문에 지배자에게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고 개인의 영달을 이루기 위하여 과잉충성을 바치면서 지배 계층, 기득권 계층보다 보다 오히려 더 잔인하고 가혹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존재로 지배자들에게 찍히기 때문이다. 뒷짐을 지고 있는 지배 계층과는 달리 실질적인 탄압을 실행하는 역할을 하며, 배신자로 여겨지기까지 하기 때문에 피 지배 계층에게 극도의 증오를 받는 존재이다. 물론 궁극적인 책임은 앞잡이 역할을 강요하는 지배 계층에게 있지만, 적극적으로 이에 동조한 앞잡이들 역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므로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민족이나 타 집단, 타국인을 억압하는 것은 자기 집단을 위한 일이나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그보다 동료, 동족을 배반하는 것이므로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3.1운동의 기념식도 중요하지만 친일매국노의 실상을 알고 그들의 앞잡이 노릇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