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해방 후 미군이 우리나라를 3년간 군사통치 하였다.]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 회담을 통해 남북 평화공존을 부르짖는 이 시기에 필자가 남북분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남북분단이 우리민족과 국가에 미쳤던 바람직하지 못한 피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이며 또한 이런 상태가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를 남과 북으로 분단시킨 주체 국가는 미국과 소련이며 이를 실행에 옮긴이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부패한 독재자 이승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부정부패를 우리사회에 만연시킨 범죄 때문에 4.19 민중혁명에 의해 대통령 직에서 쫓겨나서 미국의 하와이 섬으로 도망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미국에 대해서 너무 고마워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뉜 과정들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을 수 있지만 독자들의 편견과 오해를 불식시키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남북 분단과정을 펼쳐보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왜곡된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아야 하며 아울러 남북한이 평화적 공존관계의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분단시킨 자들의 행적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한반도의 우리 민족이 어떻게 분단되었고, 그 분단의 폐해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서 1943년 11월 27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 그리고 중화민국의 국방의회 위원장 장제스가 회담을 갖고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승인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게 된다.]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국과 소련의 군인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며 한반도를 각각 분할 점령한 지리적 분단이 시작되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의 동북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 경쟁이 낳은 분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단은 1945년 12월 신탁통치 논쟁을 계기로 계급적 이념적 분단이 심화되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정부를 수립하려고 할 때 미국과 소련이 우리나라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 및 치안유지를 한다는 명목으로 신탁통치 안을 내놓게 된 것이다. 소련의 남하 정책과 미국의 소련 저지의 국가적 이익이 한반도에서 충돌 했던 장면이며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자국의 친정부 수립 국가를 만들고 싶은 이해관계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이에 의해서 협상을 계속하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4개국 대표에 의한 신탁통치를 기본 취지로 하는 미국 측의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 취지로 하는 소련 측의 수정안이 토론되었다.

 회의 결과 12월 28일 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표되었다. 첫째,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해를 빨리 청산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a provisional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한다. 둘째, 연합국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셋째,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국제 연합(UN)의 신탁을 받은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의 일정한 지역을 대신 통치하는 제도를 신탁 통치라고 한다.]의 협정은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이 협정내용에 대해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추대를 주장하던 한국독립당· 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세력은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국제적 원조방안으로 선전하면서 신탁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반면에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박헌영 의 조선공산당 등은 3상 회의의 결의를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합의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좌우익의 대립에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조선인 중심의 임시정부를 최고 5년 동안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이 공동 관리한다는 안이 확정되었는데 이승만은 반공주의가 철저한 사람으로서 좌익세력과는 타협할 수 없다는 불신을 깊게 가진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 발언을 통해서 좌익세력과는 타협할 수 없으니 차라리 남한만이라고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을 했다. 남북분단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발언 이었다.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 계열 등은 각각의 남북한 정부수립이 나라 분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심각성을 인식하였고 각각의 정부수립에 적극반대하며 좌우합작을 통해서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미군정에 의해서 남한에서 헌법위원회가 설립되고 북한에서는 공산당조직을 중심으로 인민민주주의 단체가 설립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안은 반탁과 찬탁 논쟁에 휩싸여서 진행 될 수 없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한반도 문제를 미국의 뜻대로 결정하여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북한은 유엔의 결정은 무효라며 유엔 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유엔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강행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이해관계와 이승만 에 의해서 남한단독 정부가 수립이 된다. 이 과정에서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 계열 등은 나라분단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고 결국 이들이 배제된다. 그 뒤 북한에서도 공산주의 인민민주공화국이 수립되고 이러한 국제적 정세는 38선을 기준으로 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국정운영에 친일파 관료, 경찰, 군인들을 그대로 이용하게 된다. 기존조직이라 국가를 안정시키기에 이용하기 편했고 이승만도 지지 세력이 별로 없는 해외파 정치인 이였기에 친일파세력들을 끌어안았고, 장교출신들의 출신성분을 보면 만주 일본군 장교 출신, 일본 제국주의 장교 출신이었는데 여기서부터 대한민국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게 된 것이다. 남한에는 "친일파를 처단하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이러한 당연한 구호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는 사회와 국가의 혼란을 야기하는 폭도들로 보였고 모두 소탕해야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에 의해서 독재화와 민중 탄압은 가속화된다.

 남북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1차적인 책임은 미국과 소련에 있다. 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신탁통치를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대한민국의 분열과 갈등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 스스로도 물론 책임이 있다. 최대 5년 동안 행해지는 임시정부에 의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대한민국의 통합과 민족 우선적인 시각을 가졌었더라면 분단되지 않았을 텐데 찬탁, 신탁반대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분열되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2차적인 책임은 초대 대통령 독재자 이승만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라도 정읍 발언을 통해서 남한단독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미군정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 후 미국과 소련 간의 한반도 분할 점령이 결정됨에 따라 삼팔선[한반도 북위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미군에 의한 군사 통치가 실시되었다. 중장 존 하지(John Reed Hodge)[1893년 6월 12일~1963년 11월 12일]의 지휘 하에 미 육군 24군단이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로 들어와 9일 삼팔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하였고, 이어서 12일 소장 아널드(A.V. Arnold)가 군정 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미군정 체제가 수립되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중심의 남한정부 단독수립, 나중에는 친일파 기득권화 민족계열 인사 배제 등의 정말 뼈아픈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냉전 체제하에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주둔한 미군과 소련군은 우리 민족이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익에 따라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결국 민족 분단을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분단사태가 계속되자,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가 일으킨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동족상잔을 겪게 됨으로써 민족구성원인 상대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갖는 심리적문화적 분단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분단을 더욱 고착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남과 북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괴뢰'와 '원수'로 규정하는 냉전문화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분단을 전면화하였다. 분단이 이렇게 복잡한 중층적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분단의 해소인 통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님을 시사한다.
 우리 민족이 통일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이와 같은 중층적 문제의 해결에 노력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국토 통일과 체제 통일 그리고 마음의 통일을 이룩하여야 진정한 남북통일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남북분단은 평화적이고 자주적이며 자유롭게 살아야 할 우리 민족의 삶을 제약해 왔다. 남북한에 적대적인 대결체제를 성립시켰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속박하며 평화롭고 창의적인 민족의 삶을 펼칠 기회를 제한하였다. 또한 남북한 모두의 사회발전을 지체시키기도 하였다. 분단은 한반도에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 형성, 유지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으며, 국방비의 과다한 지출로 인해서 보다 빠른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이 더욱 심화된 채,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분단은 우리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강화를 제약하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분단 상황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평화적이고 자주적이며 자유롭게 살아야 할 우리 민족의 삶을 제약해 왔다. 또한 남북한에 적대적인 대결체제를 성립시켰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속박하며 평화롭고 창의적인 민족의 삶을 펼칠 기회를 제한하였다.

 이렇듯 분단은 현재의 우리 삶을 왜곡하는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으로 인해 우리가 치르는 부정적인 대가를 '분단비용'이라고 한다면, 그 동안 누적된 비용은 엄청나다. 그러나 현재 진행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남북한 판문점 회담을 통한 평화공존과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상호정책들이 우리나라의 앞길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그동안 쌓였던 적대감 해소에는 상당한 문제점을 노출할 수 있다. 또한 이념적 갈등해소도 남북이 풀어야 할 큰 난관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각종집회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북한 평화공존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불신하는 단체들이 매우 많음을 실감한다.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자국중심의 경제적 이익에만 전념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념논쟁으로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 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멸망의 길로 안내 할 뿐이며 국가 전체를 비극의 함정으로 빠트릴 뿐이다. 우리는 남북한의 평화공존 환경의 조성으로 하루빨리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하며 그것만이 남북의 민족동질성을 회복하고 우리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밝게 해줄 것이다.
 낡은 좌우 이념 논쟁을 부추겨서 갈등과 대립을 일삼는 정치꾼들은 이 사회에서 하루빨리 추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지고 남북평화공존에 적극 협조해야 하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한반도의 이념적 대결을 해소하고 한민족 동질성을 원상복구 시켜는 일에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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