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란 낱말 그대로 돈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가 신[神]을 숭배하는 종교마저 황폐화 시키고 있으며 사회적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와 종교를 결부시키는 것은 종교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가 우리사회 속에 속해있으며 그들의 역할이 사회의 소금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종교생활이란 신[神]을 숭배하는 인간 최고의 선[善]의 경지이며 고등정신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종교야말로 인간사회의 선[善]과 악[惡]이라고 규정지어진 것들을 판별하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종교는 신[神]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의 문제 보다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한다. 필자는 종교인이었으며 교회의 창시자인 예수를 매우 숭배하였지만, 그가 인간사회에 제시한 핵심적 과제들에 대해 도저히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또한 예수의 핵심적 과제들을 실천하려는 종교인들을 지금껏 한 사람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핵심적 과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두 구절만 인용해보기로 하자. 첫 번째 구절은 신약성서 마가 10장에 나오는 청년과 예수의 물질[物質]에 대한 대화이다.
 “예수 가라사대 내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청년이 대답하되, 선생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 대답하되,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두 번째 구절은 신약성서 마태7장에 나오는 물질[物質]에 대한 구절이다.
 “예수 가라사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는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니 자기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믿으라고 했으나 교인들 중에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을 필자가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인간들에게 경고하였지만 교인들은 물질풍족[物質豐足]을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최고의 가치로 여긴지 오래 되었다. 이런 예수의 경고에 대해 교회와 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일반인들과 무엇이 다른지 역사적으로 비교해보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조선시대에는 학문이나 명예를 중시하고 돈을 무시하며 멀리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로 여겼다. 그래서 사농공상의 순서를 매겨 돈을 좇는 상인은 신분상의 최하위로 여겨져 멸시와 조소를 당하곤 했다. 비록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당시의 선진문명과 최고의 학문인 유학(儒學)을 전해준 중국도 이와 다르지 않았고, 서구유럽은 종교와 예술, 학문 등을 번갈아가며 사람들이 숭배하며 추구하는 최고의 자리를 넘나들었다. 그래서 불교나 이슬람교, 기독교를 가리지 않고 종교를 중시하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에서 섬기는 종교의 수장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이 일반인들에 의해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시대는 변했고 지금의 시대는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 풍조가 들어서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현시대의 최상의 가치는 다름 아닌 "돈" 이다. 정치, 종교, 학문, 예술도 모두 돈으로 치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의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이며, 부자가 되기 위해 아침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황혼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돈을 벌어 불려서 쌓아두려는 행위는 변함이 없다. 온 세상이 온통 돈을 숭배하며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겨우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의 아이들도 외국어나 영재교육을 받느라 피곤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다면 예전의 고등학생의 수업량을 방불케 한다. 학교에서의 정규수업이 끝나고 영어나 음악 등의 특기수업인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해서 듣고, 이마저도 끝나면 곧장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네학원을 돌아다니며 컴퓨터, 피아노, 미술, 태권도, 영어 등 끝도 없는 특별수업에 파김치가 되어 밤늦게 되어서야 집에 들어온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열화 같은 교육열에 등 떠밀려 세계가 놀랄만한 사교육의 전쟁터에 서있다. 매년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많지만 자신이 원하는 직업이나 직장에 들어가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학생들은 직업이나 회사에서 원하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높은 토익점수는 기본이고 많은 돈을 들여 단기 해외연수도 빼놓지 않는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원하는 직업이나 회사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역시 다름 아닌 ‘돈’이다. 정년이 보장된 신분에 높은 연봉을 제공하는 의사나 변호사 등의 고소득을 얻는 자격을 갖춘 직업을 얻기만 하면 ‘남은 인생의 매일을 신나는 휴가처럼 지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평생을 함께 지내야 하는 결혼 배우자 선택의 우선순위도 돈이 최상위에 올라있다. 결혼생활은 행복한 시간도 있지만 고난과 역경도 함께 보내야 하기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배려와 성실, 인내 등의 성품이 결혼배우자의 선택에 중요하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배우자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 조건이란 대부분 학력이나, 집안배경을 비롯한 직업이나 직장, 신분을 말한다. 재벌집안에 명문대학을 나와 장차 회사를 이끌어나갈 회장의 경영수업을 받는 청년이라면 국내 최고의 미모를 뽐내는 영화배우나 탤런트가 몸이 달아있는 조건이다. 사업가나 공무원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회지도층 인사라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다면 불법과 불의, 비도덕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지금은 법이 강화되어 어렵지만, 예전에 부동산 투기바람이 드셀 때 횡행했던 농지의 위장전입, 불법적인 딱지 매입 등을 위시하여 검은 돈을 감추려 타인 명의의 매매나 돈세탁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서민과 평범한 국민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급정보와 자리를 이용하여 탐욕의 배를 채운 이들이 사회지도층 인사가 되어 더 높은 자리를 노리고 있다. 가짜 대학학위로 교수자리를 차지하고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이 세상 사람이라면 그래도 참고 넘기겠지만, 그중에는 중견교회 목사가 지천이고 신학대학의 교수 중에도 있다고 하니 돈과 성공에 눈먼 세상을 한눈에 보는 듯하다. 이들의 인격과 도덕성을 탓하기 전에, 비록 불법이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큰 재산을 모을 절호의 기회가 자신에게 있었다면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였겠는가를 자문하여보라. 아마 명쾌한 대답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 시대는 돈과 성공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성공만능주의와 물질주의로 일컬어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복을 받아 부자가 돼서 배부르게 먹고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으며 내 소유의 집에서 살고 자가용까지 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교자들은 미국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엄청난 부자나라가 되어 우리 같은 가난한 나라를 원조해주는 세계제일의 경제부국이 되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논리로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새벽마다 방방곡곡의 교회에서는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 기도소리의 대부분은 복을 받아 부자가 되며 만사형통하게 해달라는 것이 되고 말았다.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명절이 아니라도 늘 새 옷을 번갈아 입으며 자가용을 소유한 이들로 변했으며, 그들이 다니던 교회의 헌금도 부유해지지 시작했다. 교회들은 너도나도 허름한 건물을 다시 짓거나 새로 건설되는 신도시의 한복판에 크고 웅장한 교회를 짓고 옮겨갔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 부자가 되고 만사형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 자녀가 잘되고 남편이 승진하고 사업체를 성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소리 높여 외쳤다. 목회자의 필요와 교인들의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기복신앙은 단시간에 급성장하는 교회, 중견교회에서 대형교회로, 대형교회에서 초대형교회로 커가는 교회들의 최고 성장비결이 되고 말았고, 하나님은 세상의 복을 퍼 주시는 인심 좋은 이웃의 부잣집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출처: 예수사랑교회) 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부동산 투기와 교회재산 모으기에 정신이 없고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끊임없이 헌금을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하루 세끼 먹을 수 있는 양식만 갖게 해 달라고 기도 하라고 가르치지만, 교회와 교인들은 에어컨과 히터와 첨단 기기가 설치된 솔로몬 왕궁 같은 교회시설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하나님과 그 생명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돈과 권세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몇 해 전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려보자. 한기총(한국기독교 총연합회)은 한국 개신교를 이끄는 유능한 목사들로 구성된 한국교회의 대표적 단체이다. 이런 한기총이 대표 목사를 선출하면서 금권타락선거를 보여주었다는 기막힌 사건이다. 교회가 정치집단화 되면서 물질과의 유착관계를 끊지 못한 채로 한국교회가 또 하나의 타락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후보자들은 중간 선거 브로커나 실세들에게 돈 봉투를 돌릴 수밖에 없었고, ‘돈’선거를 하지 않으면 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교회연합신문)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금권선거가 교회 안에서는 아직도 판을 치고 있다니, 더구나 세속의 선거가 아닌 성직자들의 선거가 돈 선거로 물들고 있다는 점에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선거 때마다 돈을 뿌려 줄을 세워야만 교계의 얼굴이 될 수 있는 풍토라면 그렇게 당선된 교계의 대표가 아무리 ‘반성과 회개’를 외친다 한들 “나는 바담 풍(風) 해도 너는 바람 풍 해라”나 다를 바 없다.(출처: 천지일보) 심지어는 목회자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교회 세습까지 자행하고 있다. 세습의  핵심은 경제적 이해관계, 즉 돈에 있기 때문이다. 초대형교회 목회자와 소수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수많은 교인들의 헌금과 봉사의 결과로 얻어진 성장의 결과물을 독과점하고 있으며 그들은 경제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부의 향락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종교의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는 인간심성을 타락시키는 원천이며 인간심성의 황폐화를 촉진함으로서 사회악으로 달려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런 댓가 없이 인류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목회자는 왜 월급(사례비)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목회자는 돈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장사꾼이 아니며 복음의 의미는 신[神]이 인간에게 그저 베푸는 자비이며 ‘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말이다. 인간이 종교를 빙자해서 오늘도 종교 안에서 신[神]을 농락하며 죽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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