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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모, 역모, 그것도 역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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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05  10: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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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서울 잠실 롯데 호텔 뒤편에 있는 석촌 호수가 있다. 석촌 호수 뒤편 삼전동 방향으로 공원이 하나 있으며 거기에 대리석으로 된 큰 돌 비석 하나가 있다. 이 비석은 높이가 395cm 너비가 140cm이며 왼 쪽에 몽골문자, 오른 쪽에 만주 문자, 뒤쪽에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공하여 항복 받은 청 태종의 승전을 칭송한 대청황제 공덕비다. 이 비석에게도 애환이 많다. 1985년 고종(26대)이 ‘굴욕적인 보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로 삼전도 비를 한강에 처넣으려고 했다. 그 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조선인들의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해 이 비석으로 도로 건져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근처 주민들이 이 비를 땅 속에 파묻어버렸는데 1963년 대홍수가 났을 때 비석이 다시 솟아 나왔다. 이 민족의 치욕을 두고두고 되새겨 보라는 계시인 것 같다. 그 후 문화재관리청에서 500평 정도의 소공원을 조성하여 기기에 이 비석을 세워 놓았다.
 전쟁이라 할 수 없는 일방적으로 왕이 항복해 버린 이 굴욕적인 서곡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역모에 성공한 인조반정에 그 책임을 돌려야 마땅할 일이다. 또 쿠데타에 성공한 무리들은 이제 저희들 끼리 감투싸움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그 대표적 사례가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 후 성공의 주역인 서인들은 친명배금(親明背金)정책을 펴 나갔다. 반정의 주역 중 한 사람이 이괄이다. 학문이 좋으면서도 무과에 급제한 이괄은 반정군의 수뇌인 김 류를 대신해 반정군의 핵심 역을 맡았다. 그러나 반정 후 논공행상에서 김 류는 일등공신이 되고 이괄은 이등공신이 되었다. 내심 병조판서를 기대하고 있던 이괄은 불만일 수밖에 없는데 거기다 그는 평안도 절도사로 임명되어 중앙 요직에서 밀려났다. 이괄이 부임한 직후 기자헌, 한명련 등과 모의하여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문 회, 이 우의 고변이 있었다. 이 역모 고변에는 이괄이 직접 역모에 관여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괄의 아들 이 전에게 역모의 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괄이 추이만 보고 있던 중 인조가 이 전을 잡아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 전을 잡으려는 금부도사가 도착하지마자 이괄은 그 금부도사의 목을 한 칼에 베어버렸다. 그 길로 이괄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했다. 아들 이 전을 역모로 옭아매면 이괄 또한 역모로 몰려 죽음으로 내몰릴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이 우 등의 역모 고변을 조사해 보니 무고였음이 드러났지만 그렇더라도 이괄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중앙의 서인 세력이 변방에 있는 이괄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이었던 것이다. 이괄의 반군은 관군을 이끄는 장만의 대군을 격파하고 도성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황급히 공주로 몽진하였다. 이에 이괄은 한양에 입성하여 인조의 숙부인 흥안군 제를 왕으로 추대했으니 조선에 두 명의 왕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전열을 정비한 관군은 도원수 장만과 정충신의 맹활약, 그리고 이괄 군부의 내분에 힘입어 난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서북방의 방어 능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조정에서는 무인들을 의심하여 집중적으로 기찰했다. 이 바람에 무인들은 군사훈련을 기피했고 그 후유증이 후금 침입 때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후금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도성을 점령하고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농성으로 막을 내린 것이 인조의 항복이다. 이 항복 예식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언 땅에 부딪칠 때 그 소리가 청 황제의 귀에 들려야 했다. 인조는 맨 땅에 가시 자리를 펴고 앉았고 청 태종은 수항단이라는 9층 계단을 만들어 놓은 꼭대기에 앉아 절하는 인조를 굽어보고 있었다. 머리를 땅에 부딪쳐 청 태종의 귀에 들리게 하기에는 여간 세게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조는 머리에 피멍이 들도록 아홉 번 부딪친 것이다. 이나마도 청군의 선봉장 용골대가 많은 관용으로 너그럽게 대해 준 덕분에 넘어 간 것이다.
 청이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와 둘째인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고 철군한 뒤에도 조정에서는 삼전도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반청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명을 치겠다는 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인조는 쿠데타의 명분인 숭 명 대의를 부정하고 인조 16년인 1640년 상장 임경업과 황해병사 이 완이 이끄는 조선 수군 6천명을 파병했다. 원군의 총수인 임경업은 대표적인 반청 인물이었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 명령에도 전진하지 않았고 명의 수군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가끔 발포한다는 것이 엉뚱한 곳에 대고 쏘았고 일부러 자신들의 배를 부수었으며 일부 군사들을 투항시키는 등의 행위로 청의 분노를 샀다. 결국 임경업은 청군에 체포되고 압송되어 가다가 중간에서 탈출하여 명에 투항했다. 청의 요청으로 임 경업의 아내는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자살했으며 임경업은 명에 투항한 후 평로장군, 총병 등으로 활약하다가 남경이 청에게 함락되고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다시 청군에게 체포되었다. 임경업이 청에 체포된 것을 알게 된 인조는 임경업의 소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심기원의 역모사건에 임경업이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임 경업은 조선으로 송환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숨을 거두었다. 줏대 없고 아무 생각이 없는 왕 아래서는 명장이 배겨날 수가 없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눈 밖에 난 충장공 김덕령이 역모의 혐의를 쓰고 고문에 못 이겨 죽었고 이순신도 죽을 번 하다가 살아났으며, 강홍립과 임경업은 인조에게 맞아 죽었다. 임경업을 청나라를 배척하는 화신으로 여겼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이 후 임경업의 무용담을 담은 작자 미상의 ‘임경업전’이 나돌아 널리 읽혔으며 무속에서는 그의 화상을 모시고 최영, 남이와 함께 가장 영험 있는 신으로 받든다. 
 위에서 임경업을 옭아맨 역모의 주인공 심기원은 반정 공신이었으면서 철저한 척화파로서 반청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인조가 항복한 후 항복의 치욕을 씻으려는 의지가 없다고 하여 이를 큰 수치로 여겼다. 심기원은 수 천 냥의 군자금을 마련해 군사를 기르는 한 편 임경업을 명나라로 망명시켜 명군을 지원하고 자신의 거사에 조. 명 연합군을 동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인조를 몰아 내 상왕으로 올리고 세자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며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몰아내기로 작정했다. 그 당시 명의 패잔병들이 국경 언저리에서 청에 항거하고 있었고 임경업도 명군과 합세하여 청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러한 거사가 실행에 옮겨지기도 전에 내부 고변 자가 있어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이들의 쿠데타 목적은 북벌이었다. 이들은 일이 이루어진 후 임경업이 이끄는 명군과 합세하여 요동을 차지한 후 심양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에게 씌운 죄목 중 제일 큰 죄목이 배은망덕하게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는 것이었다. 이괄은 어차피 죽을 바에야 한 번 시도 해 보고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고 임경업과 심기원은 인조반정의 명분인 친명배청에 따 부합하는 것이지만, 이미 성공한 쿠데타에서는 더 이상의 명분이 필요 없었고 감투싸움의 승리만이 그들의 안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 되는 이런 나라에 누가 올바르게 충성하려는 마음이 생겨났겠는가 싶다.


※ 본 칼럼은 故서재순 본지 논설위원이 미리 보내주신 유작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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