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나라를 창업할 때 그 묘호를 추존하여 태조(太祖)라 하는 것이 상식이자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한(漢) 나라를 창업한 유방(劉邦)의 추존 묘호가 고조(高祖)이듯이, 태조(太祖)라는 묘호는 고구려의 여섯째 왕인 태조 제(太祖帝)가 그 효시가 된다. 그 이후 송나라의 송 태조 명나라의 명 태조, 고려 태조, 조선 태조 등 많은 창업 왕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태조 제는 고구려의 6대 왕이니 따지고 보면 나라의 창업주도 아니지만, 왕이 93년이 넘는 재위 기간 중 오로지 단군조선의 광활한 영토 수복에 전념하여 고조선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전 국민을 충성심 하나로 뭉치게 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안정된 나라를 이끄는데 성공한 보기 드문 명군임을 온 나라 신료들과 백성들에게 높이 추앙받고 인정받기에 받기에 이르러 태조란 묘호를 얻기에 이른 것이다.
 고구려 5대 모본 제(慕本帝)가 폭정으로 밀려나고 7세의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태조 제에 대하여 중국 후한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눈을 들어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라 하였고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다. 옛 영토수복으로서의 첫 과제인 요서지역 공격에 성공하였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동한(東漢 또는 後漢)과 함께 명실 공히 대륙의 맹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때 부터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종주국으로서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기원 후 55년 2월에는 요서 지역에 10개성을 쌓아 후한의 침략에 대비했으며, 이듬해 7월에는 동옥저를 멸하여 동쪽 국경을 창해(동해) 까지 확장하였다. 68년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의 항복을 받아 갈사부여를 병합하였으며, 4년 뒤에는 관나부의 패자인 달가에게 군사를 내 주어 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2년 뒤인 72년에 환나부 패자인 설유에게 군사를 내주어 주나를 치고 그 왕인 울음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고구려의 세력이 팽창하자 부여는 후한에게 연합을 제의했고, 위기감을 느낀 후한 역시 이 제의에 응하여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후한을 세차게 몰아쳐 두 번이나 위기에 몰렸으나 그 때마다 부여가 후면을 기습하여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 동안 후한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탄 고구려는 산동 반도 쪽으로 진출하여 동해 쪽을 점령하고 화북 평원 쪽으로 진출하였다. 내우외환에 휩싸여 허약해진 후한을 마음껏 공격한 끝에 영토를 크게 넓힌 고구려의 세력은 이미 후한보다 훨씬 강한 나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서기 101년 고구려는 예맥과 함께 현토를 공격하여 화려 성을 함락시켰다. 서기 105년 후한의 화제가 병으로 드러눕고 내정이 어지러워 진 틈을 탄 고구려는 요동의 6개현을 점령하였다. 요동태수 경기가 반격해 오자 일단 철수했던 고구려는 그 해 9월 다시 요동을 쳤다. 이렇게 치고 빠지는 작전 속에 고구려는 점점 산동 반도 쪽으로 밀고 들어간 것이다. 이듬해(106년)에도 정권 다툼이 그칠 새 없는 후한은 화제 유고가 죽고 상제 유륭이 즉위했다. 서기 111년 고구려는 후한의 혼란을 틈 타 다시 고토회복 작전에 나서 이번에는 예맥의 군사를 파견하여 현도를 기습하였다. 후한은 서기 121년 유주태수 풍환, 현토 태수 오광, 요동태수 채풍 등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항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태조제의 아우인 수성이 이끄는 고구려 군에게 크게 패퇴하고, 다시 대대적인 증원 군과 함께 쳐들어 온 후한 군 또한 크게 패퇴하고 돌아갔다. 이어서 고구려군은 북방의 선비족과 연합하여 후한의 요대 현을 공격하였다. 이에 요동 태수 요광이 군사를 동원하여 저항했으나 구구려 군에게 그의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고구려의 이 같은 영토 확장은 단순히 땅이 넓어졌다는 사실을 넘어서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고구려의 주 무대인 요동은 가뭄과 메뚜기, 우박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광활한 화북 평원에 진출함으로써 농토가 넓어져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었다. 또한 발해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동해(황해)를 차지함으로써 어업을 통한 생활 안정도 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압박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후한은 내분을 겪고 있던 탓에 줄곧 수비태세만 취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부여에 원군을 청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고구려가 무서워진 후한은 122년 굴욕적인 화친 제안을 해 오니 ‘지금 이후로 우리는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친근함으로 함께 살아있는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 환속 값으로 사람마다 비단 48필을 주고, 어린 아이는 값을 반으로 하겠습니다’라는 것이다. 146년 8원 고구려는 후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 현령의 가족들을 사로잡았다. 이어 태조 제는 아우인 수성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19년 후인 서기 165년 11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태조 제(太祖帝)의 태조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나라의 창업보다 더 큰 공이 있다는 뜻이고 거기다 이제는 변방국이 아니라 황제 국임을 만 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국력으로 보아 황제 국을 선포한대 해서 전혀 손색이 없고 아무도 시비를 걸만한 세력도 없었다. 따라서 태조라고 붙인 것은 그가 고구려를 재탄생시켰을 뿌 아니라 황제 국으로서의 위상을 대 내외적으로 표방한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태왕(太王)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황제(皇帝)에 대한 고구려 식 표현인 것이다. 
 이처럼 앞뒤를 돌볼 수 없는 후한이 무슨 수로 이른 바 그들이 말하는 한사군을 지금의 평양 근처에 두고 다스릴 수 있었겠는지 기록으로도 상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일제 식민지 사학자 이병도가 한사군 본거지를 평양이라고 교과서애 싣고 지금도 가르치는 바람이 떡이 입으로 저절로 굴러들어온 중국에서는 옳다구나 하고 그들의 옛 사사들을 이병도 방식으로 고치고 옛 지도마저 고치면서 심지어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지도마저 평양 근처 까지 자기네들 땅이었던 것처럼 그려 놓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로 고구려 건국 보다 조금 앞서 한 무제가 도적의 무리 위만의 손자인 우거 정권을 쳐서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나 우거 정권이 있던 험독은 지금의 갈석 산과 산해 관에 걸친 지역이었다. 바로 이 곳 임유관(산해관)에서 고구려 26대 영양제 때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총원수 강이식 장군과 부원수 을지문덕 장군의 합작으로 을지문덕이 적의 양도(糧道) 급습 성공을 서막으로 대승을 올린 곳이니 설혹 한사군이 있었다 해도 산해관과 갈석산 주변이지 평양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 본 칼럼은 故서재순 본지 논설위원이 미리 보내주신 유작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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