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희대의 폭군 연산군이 밀려나고 나이 어린 중종에게는 그냥 어리둥절하기만 한 가운데 허수아비처럼 이끌려서 왕위에 올랐다. 반정이 마무리 된 후 공신이 117명에 이르렀으니 이들 중에는 공도 없이 공신 록에 오른 사람들도 많았다. 반정 주동자들은 삼정승이 되고 박원종은 정승에다가 병조판서를 겸했다. 어린 중종의 권위는 초라한 모습이었으니 이들 삼정승이 조회에 참석한 후 물러갈 때면 왕이 꼭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들이 문을 나간 후에야 자리에 앉았으니 왕조 국가에서 그 전례가 없던 일이다. 이 공신 정승들은 중종 8년(중종 25세 때) 모두 죽으면서 그 종말은 왔다.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지내던 왕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었으니 젊은 신하 조광조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는 중종 10년인 34세로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 14년 기묘사화에 희생됨으로써 끝이 났으니 그가 조정에서 활약한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그 사이 그는 조선 역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조광조는 젊은 시절 무오사화, 갑자사화 그리고 중종반정 등 사림파의 다수 희생당하는 정치적 격변을 보면서 성장했다. 그는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조선의 기강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명제를 품게 되었다. 세조의 찬탈, 연산군의 폭정, 중종반정 후 반정 세력들의 타락 등이 모두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왕과 신료들의 잘못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당시 왕조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했으며 또 조선 왕조가 지향해야 될 유교이념의 방향을 재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노력은 저항세력을 만나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사상적 유산은 조선 왕조 유학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중종이 조광조에게 벼슬길에 나오도록 미관말직을 제수하자 그가 너무 뛰어나다는 이유로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라고 채용을 반대하는 신료들이 있을 정도였다. 훗날 크게 쓰기 위하여 지금 등용하지 말자는 간언이었으니, 조선 역사상 이런 대접을 받은 인물은 조광조뿐이다.

 조광조가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은 담양부사 박 상과 순창 군수 깁 정과 더불어 올린 폐비 신  씨의 복위 문제였다. 대간들은 그의 의도가 간사하다면서 그들에게 죄 주기를 청하고 나서자, 조광조가 나서서 언로를 막는 이런 대관들과는 같이 일을 할 수 없으니 모두 파직시키라고 주청했다. 이들 대간들과는 달리 당시의 삼정승이 조광조의 편을 들자 대간 전부를 교체하고 왕비 신 씨를 복원하지는 못했지만 조광조의 입지는 일거에 확고해지면서 사림세력이 자리를 잡아갔다. 왕은 이를 계기로 왕권 강화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조광조는 왕권 강화가 아닌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의 실현에 핵심이 있었으니 이들의 동상이몽이 나중에 기묘사화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그의 개혁은 궁중의 불교행사인 기신제 혁파, 도교적 기구인 소격서 혁파, 과거 제도의 하나인 현량과 실시, 토지개혁과 공신 위훈삭제 등으로 날개 돋치게 뻗어나갔으나 기존 훈구 세력들의 모함과, 이제는 조광조를 견제 대상으로 생각한 중종의 뜻이 맞아 떨어지면서 기묘사화를 맞아 모든 개혁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중종이 처음 제위에 오를 때 나이도 어리고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소신대로 정사를 이끌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제 그들 공신들의 위세가 사라지고 왕으로서의 실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아직도 공신들의 위세를 벗어나서 오로지 왕권을 강화해야겠다는 일념이 그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고, 게다가 그의 천성적인 우유부단이 조광조라는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을 발길로 차게 만든 것이다. 조광조의 개혁이란 사실상 개혁이 아닌 제자리 찾기 운동에 불과했지만 바로 그 당연한 외침이 허무한 메아리로 사라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오자서는 정쟁에 휘말려 아버지와 형이 피살당하는 불운을 겪고는 오나라로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그는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위해 오 왕 합려를 부추겨 초나라의 수도인 영도를 함락시키고 이미 죽은 원수 평 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에 300번이나 무자비하게 매질을 가했다. 나중에 회계 산에서 월 왕 구천이 합려의 아들 오 왕 부차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 오자서는 이 기회에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강화 파 백비의 꼬드김에 판단력을 잃은 부차는 오자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기를 벗어난 월 왕 구천은 와신상담하여 재기의 칼날을 갈았고 월나라 안에서도 국내 정치를 과감하게 개혁하고 외교 정보망을 재정비했다. 세금을 줄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 편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여 기초경제를 튼튼히 해 나갔다. 이 모든 것이 복수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고 그 중심에는 대부 문종과 범려가 있었다. 오나라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오자서는 간신 백비의 모함을 받고 자살을 강요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자서는 ‘내 눈알을 빼서 오나라로 들어오는 고소 산(姑蘇 山)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가 오나라로 쳐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게 하라’는 섬뜩한 말을 남기고 부차가 보낸 촉루 검으로 자결한 것이다. 오 왕이 합려에서 한 세대 넘어 간 부차가 왕이 되자 오자서에게는 합려와 같은 신뢰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국 초나라를 떠났던 오자서는 오나라를 제 2의 조국으로 삼아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합려에게 통했던 그 충성심이 부차에게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니, 부차에게는 합려만큼 절박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원 전 482년 오 왕 부차는 정예군을 이끌고 북상해 황지(黃池)에서 진(晉), 노(魯)의 제후들과 회맹(會盟)하여 패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고자 했다. 오자서가 그토록 말렸던 성급한 군사행동에 기어코 나선 것이다. 오 왕 부차는 노, 위의 회맹에 성공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황지에 대규모 회맹(맹주로서의 맹약 체결)으로 중원의 패주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오나라가 천 킬로가 넘는 곳에 주력군을 총동원시켰다는 정보를 입수한 월 왕 구천은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오나라에서 풀려난 지 12년, 오신상담 준비한 지 10년의 기다림과 준비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월나라 군은 거침없이 오나라로 밀고 들어갔고 오나라는 회오리바람에 쓸리듯 맥없이 무너지고 오나라 태자도 월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이 소식을 멀리서 들은 부차는 경악했지만 몇 년 동안 벼르던 맹주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소식을 비밀에 부친 채 회맹을 강행했다. 회맹을 마친 부차는 구천에게 사신을 보내 예물과 함께 정중하게 강화를 요청했다. 그로부터 10년에 걸쳐 양국 간에 싸움은 계속되었지만 오나라는 계속 패하여 수세에 몰리자 고소 산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강화를 청했다. 과거 오자서가 부차에게 강화를 만류하듯 범려가 구천에게 간했다. ‘이제 하늘이 오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려 합니다. 하늘이 주시는 것을 받지 않으면 천벌을 받습니다.’ 하면서 강화를 청하러 온 오의 사신에게 ‘왕께서 나에게 모든 일을 맡기셨으니 사신은 돌아가시오.’ 하면서 범려가 스스로 앞장서 오나라 공격에 나섰다. 머뭇거리던 구천도 그제 서야 결심을 굳혔다 와신상담 22년의 결말은 오나라가 월나라에 합병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기회가 왔을 때의 우유부단, 그 결과, 그리고 범려의 결단으로 매듭을 짓는 모습을 보여준다.


※ 본 칼럼은 故서재순 본지 논설위원이 미리 보내주신 유작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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