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창업주인 단군왕검(1세), 단군부루(2세, 단군가륵(3세)에 이어 4세 단군이 단군오사구(烏,斯丘) 때에(기원 전 2182-2137년) 단군의 아우인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理汗)으로 봉했다.
이처럼 우리 조상과 같은 뿌리인 흉노의 활약상은 광범위하고도 강력하지만 중국에 대해 그들이 어떠한 존재였는지 그 일부를 보기로 한다. 한(漢)의 고조 유방은 북방을 안정시키고자 흉노 정벌에 나섰다. 흉노의 묵돌 선우는 패주를 가장하여 한 군을 북방으로 유인하는 작전으로 나갔다. 그러자 한 군은 추격에 나섰다. 묵돌은 정예군을 뒤에 감추고 약한 병사들을 방패로 내세웠다. 고조는 전군의 선두에 서서 평성에 입성했다. 하지만 추격을 서둘렀기 때문에 대열이 늦어져 후속 보병 부대는 아득한 후방에 쳐져 있었다. 묵돌은 이 기회를 타서 정예 40만 기를 내보내 고조가 이끄는 선두 부대를 백등산 위에서 포위했다. 이에 고조는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 후 한 나라에서는 문제가 즉위하고 흉노와 다시 화친조약을 맺었다. 문제 3년 5월에는 흉노의 우현왕이 오르도스에 침입하여 이어 상군의 요새를 공격했다. 이 지역의 한 나라 수비대가 궤멸당한 것이다. 이에 한 나라에서는 승상 관영을 내보내어 토벌케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묵돌이 문제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일찍이 황제께서 화친 요청을 하였을 때 우리는 서로의 취지를 양해하여 화친을 받아들였소. 그럼에도 귀국의 국경 수비대가 우리 우현왕 영지를 침범하고 또한 우리 쪽의 우현왕도 이 곳 선우에게 무엇 하나 조회함이 없이 휘하의 장군 후의, 오후, 난지 등의 헌책을 사용하여 귀국의 수비대와 일을 벌였소. 이들은 모두 양국 군주의 약속을 어기고 형제국의 우의를 저버리는 행위를 저질렀소. 이 사건에 관해서 황제로부터 매 번 힐문장을 받았으므로 이쪽에서도 사자를 통하여 회답을 보냈소. 그런데 이 사자는 귀국에 간 채 돌아오지 않고 도한 귀국에서도 그 후 한 사람의 사자도 오지 않았소. 그 후로는 양국은 화친의 관계를 끊은 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오. 원래 귀국의 수비대가 약조를 깼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번에 우현왕에게 벌로서 서방 월지국 토벌을 명했소. 우리 군대는 하늘의 가호와 단련된 병정과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항복 시키거나 혹 참살로 토벌했고 아울러 누란, 오손, 호게 및 그 인접26개국을 평정하여 모조리 우리 흉노에 병합했소. 이에 활을 무기로 삼는 여러 민족은 완전히 통합되어 북쪽 지방은 하나로 평정되었소. 현재 우리의 희망은 무기를 버리고 병사와 말에 휴식을 주며 여태가지의 원한을 씻어버리고 화친 조약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옛날처럼 변경 백성을 안심시키고 어린 것들을 건강하게 성장하고 늙은 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천하를 이룩하여 이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이오.
이에 한나라에서 중신회의가 열리고 이 화친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이 났다. 곧 이어 묵돌 선우가 죽고 노상 선우가 제위에 오르자 한의 문제는고조의 전례에 따라 황족의 딸을 공주로 꾸며서 선우에게 짝 지우기로 하고 그 후견인으로 연 나라 출신의 환관 중행렬(中行說)에게 동행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그는 흉노로 가는 것을 꺼려 빠지고 싶어 했으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흉노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에게 항복하고 선우의 측근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선우에게 진언했다. ‘흉노는 인구로 친다면 한의 1군보다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한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의 풍습이 한과 달라서 한의 공급을 바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우께서는 흉노 본래의 습속을 버리시고 한의 물산을 즐기시는 모양이온데 이처럼 위험한 경향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한이 소비하는 물산의 2할을 흉노가 소비하게 되고 흉노는 사사건건 한에게 귀속되고 맙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한의 비단이나 면을 입수하면 그것을 입혀서 가시밭 속을 달리게 하십시오. 면은 곧 여지없이 찢어지고 가죽옷이 얼마나 뛰어난 물건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또한 한의 음식을 입수하시면 즉각 버리시고 흉노의 유제품이 얼마나 편리하고 맛이 좋은가를 나타내셔야 합니다.’이 후 중행렬은 한 나라 사신들을 접할 때마다 그들을 신랄하게 꾸짖고 흉노를 위해 충성하였다.
이제 다시 전쟁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 나라로서는 숙적 흉노를 무찔러 가장 큰 무공을 세운 인물은 위청과 곽거병이다. 이들 두 사람에 못지않게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이 큰 사람이 이광이다. 한 나라 군이 흉노의 선우와 중요한 결전을 벌일 때 대장군 위정에게 참전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그는 길을 잃어 본대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흉노 선우를 놓친 한 군이 이 광에게 책임을 묻자 부하들을 모아놓고 ‘나는 흉노와 70여회에 걸쳐 싸웠다. 대장군 지휘 하에 선우와 결전할 기회를 잡았으나 대장군의 명으로 우회로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었다. 이제 육십이 넘은 내가 하급관리의 심문 따위에 답하고 싶지 않다’. 면서 스스로 칼을 빼어 목을 찔렀다.
이처럼 무던히도 중국을 괴롭혔던 흉노(돌궐, 몽골, 항가리)가 우리의 동족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