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은 고려 때에 집대성한 것으로 경판 수가 8만 여 장에 달해 흔히 8만 대장경이라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고려 대장경이다. 이 경판 한 장 두께는 4cm, 8만 장을 전부 쌓으면 그 높이는 백두산 높이 (2,744m) 보다 높다. 경판 앞뒷면에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한 면의 글자는 대략 300자 정도, 전부 합하면 5천만 자가 된다. 뜻을 새기며 읽을 때 하루에 많아야 4-5천 자 정도 읽을 수 있어 통독하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릴 것이다. 이처럼 방대한 분량 뿐 아니라 고려 대장경은 질적으로도 우수해 마치 숙달 된 한 사람이 새긴 것처럼 판각 수준이 일정하고 오. 탈자도 거의 없다. 또한 보존 상태가 양호해 목판 인쇄술의 극치, 또는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 경판이 제작되던 때에 고려는 몽고와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당시의 몽고는 아시아 전역을 거의 석권한 막강한 나라였고 그런 몽고와 전쟁 중에 고려 최대의 사업이었던 대장경 간행 사업이 진행 된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불력(佛力)에 의해 몽고를 물리치고자 경판 제작에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유가 그 뿐만이 아니었으니, 당시 무신 집권자인 최 우(崔 瑀)가 강화에 천도하자 백성들 간에는 조정이 백성을 버렸다는 원망이 높아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최우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재(私財)를 내어놓고 대장경 간행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백성들의 돈독한 불심을 자극해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다른 배경은 불교 국으로 서의 위상을 높이려는 데 있었다. 고려는 11세기 초인 현종 때 이미 대장경을 만들었는데(초 조 대장경) 이 대장경 완성으로 고려는 불교 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뒤 대각국사 의천이 동북아의 주요 불교 서적들을 모아 편찬하여 목판으로 만들었다. 이는 중국보다 앞선 것으로 불교 국가로서의 위상이 한 층 강화된 것이다. 이 두 번의 대장경판은 몽고 침입 때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사건이 불교 문화국임을 자부하던 백성들을 자극해 새로운 대장경판 제작에 나선 것이다. 대장경 제작의 배경에는 무신정권이 정치적 의도가 있었지만 일을 완성해 낸 주역은 전 고려인의 합심한 불심과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응집이 이 경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이 이 고려 대장경을 탐을 냉 것은 고려 창왕 때(1,388년) 부터다. 주로 인쇄본을 요구했지만 경판 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세종 조 때엔 일본 사신 단이 단식 투쟁을 벌인 일도 있다. 일본 사신이 대장경 약탈을 모의하는 서한을 일본에 보낸 일도 있다. 일본 왕은 대장경을 얻지 못하면 조선 사신을 냉대했고 사절단에게 보복하려는 왜인도 있었다. 일본이 이렇듯 빈번하고 집요하게 경판을 요구한 이유는 여말 선초 당시 일본 사원의 위상에서 찾을 수 있다. 백성의 두터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일본 사원에 대하여 국왕이나 호족들도 무시할 수 없었는데 거기에 대장경 까지 구비한다면 더 할 나위 없었으리라. 일본의 요구가 빈번해지자 조정에서는 고뇌했다. 단순명료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늘 평화 교섭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왜구의 노략질을 줄이겠다거나 잡혀 간 조선인들을 돌려보내겠다는 등이다. 실제 대장경 청구 시기부터 왜구의 출몰이 줄어 세종 조 1년에는 1건 밖에 없다. 이렇게 조선조 때에 인쇄해 간 고려 대장경은 현재 일본 교토의 신사 등 여러 사찰과 대학 등 20여 곳에 남아 있다. 이 대장경이 일본 불교와 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최근까지 여러 차례 인쇄된 고려 대장경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도 전해졌다. 고려인이 총력을 기울인 고려 대장경은 세계에 전파되어 불교 연구와 확산을 도우며 세계 문화사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 목판들이 고스란히 간직해 온 고려의 역사와 혼은 750년이 지난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들 목판의 재료는 주로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산 벚나무와 돌배나무 등이다. 이 원목들을 바닷가의 뻘밭에 3년간 묻어둔다. 벌목한 나무는 이렇게 오래 방치해서 숨을 죽여야 하며 자연 상태에서는 갈라지기가 쉽다. 뻘에 묻어두면 갈라지지도 않고 결도 삭혀져 판각하기엔 더 없이 좋은 목재가 된다. 벌목한 통나무는 경판 크기로 다듬고, 그 다음 판각에 들어가게 되며 필사본을 뒤집어 붙인다. 필사본 위에 들기름을 한 번 먹이면 기름 먹은 종이와 종이의 글자가 또렷하게 살아난다. 기름이 마르면 글자만 도드라지게 돋을새김을 하는데 선이 복잡해 까다롭다. 이 땐 조각칼이 한 몫 하는데 매우 우수한 조각칼이어야 한다. 목판 영 옆엔 두꺼운 마구리용 목재를 끼운다. 인쇄할 때는 손잡이를 사용하고, 경판을 보관할 때는 활자들이 서로 닿지 않도록 사이를 떼어 놓는다. 경판 내 귀퉁이의 금속도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라 판을 단단히 고정시켜 오래 두어도 뒤틀리지 않게 만든 것이다. 경판들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옻칠도 한다. 옻칠을 두 세 번씩 하여 층이 나 있다. 옻칠은 방부, 방수, 방충의 효과가 뛰어나고 화학적인 내성도 강하며 특히 나무와 친화력이 높아 경판을 보호한다. 이처럼 고려인들은 당시의 기술과 지혜를 총 동원해 대장경 제작에 공력을 기울였다. 이 경판의 제작 시기는 13세기로 당시 대부분의 세계의 문명권이 필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다. 706년에 신라가 만든 ‘무구정 광대 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본이다. 신라의 인쇄술이 고려로 이어져 발전을 거듭했고 마침내 목판 인쇄의 정수인 대장경을 탄생시킨 것이다. 16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경판에는 상당한 물자와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경판을 만들 수 있는 목재를 통나무로 잘랐을 때 굵기가 40cm이상, 길이는 1m쯤 돼야 한다. 2m남짓한 나무를 하나 켜서 나올 수 있는 목판은 14장, 하지만 옹이가 박혀 구멍이 나거나 갈라진 것은 쓸 수가 없다. 8만 여 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선 이런 통나무가 1만 5천개 이상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벌채한 나무를 이틀에 한 번 네 사람이 각판 장 까지 운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 인력이 10만 명 내외가 될 것이다. 경판의 5천만 자는 구양순 체로 한결같다. 필사가 들은 경전을 일일이 베껴 써야 하는데 하루에 한 사람이 천 자 정도 쓴다고 할 때 5천만 자를 전부 쓰려면 연인원 5만 명이 필요하다. 여기에 소요되는 한지 제작 또한 1만 명은 있어야 한다. 판각이야말로 그 어느 일 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하루에 새길 수 있는 판각 량은 30-40자로 5천만 자를 새기려면 연인원125만 명에 달한다. 경판의 옻칠을 위한 옻 액도 상당했을 것이다. 경판 한 장단 5g정도의 옻이 필요한데 이만한 옻을 채취하는 데에도 천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밖에 내용에 대한 교정을 보고 구리 장식을 만드는 것 또한 많은 일손을 요한다. 제작을 뒷바라지 하던 사람들 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더 불어난다. 이렇듯 고려 대장경 제작은 고려 500년간의 가장 큰 국책 사업으로 구력을 기울인 대 사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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