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철종 때 어느 해 봄의 일이다.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영은 부원군 김문근의 생일잔치가 성대히 벌어졌다. 세도가인 안동김씨 일족은 물론 은 관자 금관자를 붙인 타성 벼슬아치들도 이 날 만은 거의 빠짐없이 찾아와 헌수하며 즐기는 모습이 마치 제왕의 그것만큼이나 성대하였다. 이 때 장안의 부랑배들과 거지 떼들이 앞을 다투어 그 소문난 생일  잔치에 얻어먹으려고 부원군 집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북적거리는 만좌의 내객 가운데 흥선군도 건달패들과 어울려 있었다. 원래 술 잘 먹고 놀기 잘하는 그인지라 소문난 잔치라면 초청을 받지 않아도 거의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폭음하고 그리고는 으레 주광을 부려 지탄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오늘도 그는 불청객의 한 사람으로 부원군의 생일잔치에 참석했고 안동 김씨들과 벼슬아치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권하는 대로 사양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 이미 도를 넘고 있었다. 이윽고 주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는 예의 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신명 좋은 그의 흥취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가슴 속에 쌓인 울분과 원한을 토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동시에 일부러 상대방에게 광태를 보여서 세상을 기만해 나가는 호신책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술자리에서 너무도 초라한 자신의 행색에도 불구하고 방약무인하게 놀아났다. 부원군 김문근도 세도가 재상들도 그의 안중에는 없다는 듯 그는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면서 난봉가를 부르기도 하고 횡설수설 늘어놓으며 호기를 부렸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좌중의 점잖은 손님들이 급기야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하는가 하면 김병기, 김병필 같은 안동 김씨의 젊은 축들은 입을 삐쭉거렸다. ‘아니, 저이가 또’ ‘저런 망나니가 또 어디 있담’ 그에 대한 수모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김병기가 하인을 부르더니 호령했다. ‘이 손님을 딴 방으로 모셔라’ 이 때 몇 명의 하인배들이 나가지 않으려는 흥선군을 완력으로 끌어내려고 승강이를 하는 바람에 흥선군은 먹은 것을 그 자리에서 와르르 토해버렸다. 보기에도 구역질이 나는 악취가 흥겨운 좌석을 파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보던 김병기가 주먹을 부르쥐고 하인배들을 휘몰아 세웠다. ‘무엇들 하는 거냐. 냉큼 들어내지 못하고’ ‘저런 것이 사람의 구실인가. 왕손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그러나 흥선군은 취중인 체 하면서 늠름히 섰다. ‘흥, 내가 망나닌 줄 이제 알았더냐. 먹고 새길 것도 못 되니 토하기도 예사지. 이놈들아 나는 그만두고 이 더러운 것이나 냉큼 치워라.’ 그러자 좌중에서는 이를 외면하거나 혀를 차는 자들도 있었다. 이 때 김병학이 자리에서 뛰어나오더니 ‘나으리, 오늘은 많이 취하셨군요. 어서 일어나십시오’. 흥선군은 취기에 몽롱한 눈을 들어 김병학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원한이 번득였고 일그러진 입 언저리에는 분노의 경련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러한 흥선군의 표정을 굽어보고 있던 김병학은 이윽고 하인배들에게 명하여 자리를 치우고 물을 떠 오게 하여 손수 흥선군의 더럽혀진 의관을 말끔히 고고 씻어 주었다. 그리고는 흥선군을 부축하여 교군까지 불러 태워서 그의 집으로 배송하게 하였다. 그의 흥선군에 대한 호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해 섣달 그믐날 끼니조차 잇지 못하고 있는 흥선군의 궁저(宮邸)에 쌀과 옷감과 고기를 선물하였다. 세월이 흘러 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안동 김씨들은 흥선 대원군의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자칫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입장에 처했지만 지난 날 김병기에게서 받은 후대 덕분으로 중형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흥선군의 파락호 시절 누구보다 흥선군을 멸시했던 김병기가 큰 잔치를 열고 대원군을 초청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음식을 두어 숟가락 떠먹다가 별안간 먹은 것을 도로 토해 버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네 이놈. 음식 속에다 독약을 넣어 누구를 죽이려는 거냐 ?’ 그러나 김병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원군의 소매를 붙들어 앉히면서 말했다. ‘대감께서 이제 보시면 아시오리다’. 하고 그가 넙죽 엎드려서 대원군이 토해낸 음식을 모조리 핥아 먹어버렸다. 대원군이 후일 말했다 ‘과연 김병기가 큰 놈은 큰 놈일세’.

 고구려의 침략을 우려하던 백제의 개로왕 재위 18년(472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협공을 가하자고 제의했다. 북위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일이기는 하였으니 군사를 동원할 명분이 마땅치 않아 미적거리기만 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를 당장 공격하기 보다는 간자를 보내 국력을 소모시키게 한 다음 때를 보아 공격하기로 했다. 이 간자가 고구려의 승려 도림(道琳)이다. 도림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로 가장하여 백제에 잠입하였다.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무척 좋아하였는데 바둑의 고수였던 도림은 그 점을 이용하여 개로왕에게 접근했다. 도림의 바둑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알게 된 개로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고 그런 중에 도림은 개로왕을 부추겨 개로왕의 선왕인 비유왕의 능을 조성케 하고 궁궐과 성을 새로 짓게 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개로왕의 안색을 살피면서 이렇게 진언한 것이 그 시작이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대왕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 재주 외에는 보답한 것이 없고 아직 털끝만큼 이득을 드린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대왕의 뜻이 어떤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그것이 선생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천연의 요새입니다. 때문에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품지 못하고 오로지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곽을 볼품없고 궁실은 수리도 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유해들이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왕께서 취할 바가 아닌 줄 아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징발되고 국고가 비어가고 있는 가운데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가 그 소식을 알렸고, 장수왕은 475년 9월에 3만 대병을 이끌고 백제를 급습했다. 고구려군의 기습에 당황한 개로왕은 그제 서야 도림이 간자였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고구려는 순식간에 한강 이북을 차지하고 이내 강을 건너 한강으로 쳐들어 올 자세였다. 개로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신라로 구원을 요청했다. 그 무렵 아차성에서 본진을 구축한 고구려 군은 한강을 도하하여 한성으로 밀려들었다. 백제군은 북쪽 궁성(풍납토성)에 군대를 밀집시키고 방어전을 펼쳤으나,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7일  만에 북 성이 무너졌다. 그리고는 고구려군은 개로왕이 있는 남성(몽촌토성)으로 몰려들었고 위기를 의식한 개로왕은 성을 빠져나와 달아나려 했다. 개로왕 초기에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 왕의 반대파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망명한 일이 있다. 고구려로 투한한 재증걸루가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왕의 얼굴을 잘 아는 재증걸루가 개로왕을 사로잡고 정중히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춘 다음 개로왕의 얼굴에 침을 세 번 뱉은 다음 장수왕이 있던 아차산성으로 압송한 다음 거기서 참수되는 비참한 생을 마감하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 될 일이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과도한 도움이나 환대를 받았을 때 일단 의심에서 출발하여 그 의심을 걷어 낸 다음 확실히 믿어주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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