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태어날 때부터 말재주가 좋고, 머리가 비상했으며 게다가 맹수를 맨 손으로 때려잡는 무서운 힘을 가진 사람이 은(殷) 나라의 주왕(紂王)이다. 머리가 좋아 신하의 서툰 충고 같은 것은 조금도 효과가 없었으니, 어떤 이론을 내세워도 그의 정연한 논리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천하에 자기 이상은 없다고 큰소리치며 신하들을 무능하다고 깔아뭉개고 오로지 자기 위세만을 자랑한 주왕이다. 백성들에게는 가혹한 세금을 물렸고 온갖 사치는 다 즐겼다. 제후국 중에서 가장 인망이 높고 세력이 컸던 서 백(西伯) 희창(姬昌의 아들 희발(姬發 武王)은 폭군 주왕을 몰아내고 제왕의 위에 올라 주(周)나라를 개국한 후 가장 공이 컸던 태공망(강 자아)에게 제나라의 영구 땅을 다스리는 제후로 봉했다. 태공망은 동방의 영지로 가는 도중에 조금 가다가는 여관에 숙박하는 등 먼 길을 순조롭게 가지 못했다. 그것을 보자 한 여관 주인이 말했다. ‘때란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쉽다고 합니다. 큰일을 하러 나선 분 같지 않군요’. 태공망은 주인의 말을 듣자 한밤중인데도 당장 부하들에게 출발 명령을 내리고 길을 서둘러 달려가도록 했다. 날이 샐 무렵 태공망 일행이 영구 땅에 막 닿을까 말까 하는데 느닷없어 내후(萘侯)의 군사들이 습격해왔다. 내후의 군과 태공망의 군사 사이에는 공방전에 벌어져 태공망 군이 이겨 내후 군을 진압했다. 이런 변방에는 은나라나 주나라 모두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태공망은 부임한 영구 당에서 그 고장의 풍습을 존중했고, 예절을 간소화했다. 또한 상공업을 장려했고 그 고장 특산물인 소금생산과 어업으로 산업을 크게 일으켰다. 그로부터 제나라가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수많은 백성들이 자꾸 모여들어 제나라는 차츰 대국으로 성장해 나갔다. 큰 치적을 남긴 태공망은 백세가 넘도록 살았다.

 장량은 조국 한(韓)나라가 진시황의 진(秦망)나라에 망한 다음에도 노복 300명을 거느릴 정도로 부유한 명문가의 출신이다. 장량은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은 아우의 장례도 치루지 않고 재산을 털어 창해군으로 찾아가서 ‘창해 역사’라고 부르는 힘 센 장사 한 사람을 소개 받았다. 120근이나 나가는 철퇴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창해역사와 함께 박랑사(지금 하남 성 원양 현 동남)에 숨어 있다가 진시황이 탄 수레를 잘못 골라 다른 수레만 박살난 채 실패하고 말았다(기원 전 219년), 창해역사는 잡혀 죽고 용케 몸을 피한 장량은 그 후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얻어 이 책으로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초나라 왕족을 찾아 가던 중 유방을 만났다. 이 후 유방은 항우와 더불어 천하를 다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방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데 이 때 마다 장량의 도움을 받는다. 특히 홍문연에서 항우가 유방을 죽이려 했을 때 장량은 과거에 자신에게 신세를 졌던 항량(항우의 숙부)과의 관계를 살려 유방을 탈출시킨다. 그 후 장량을 유방이 도읍을 선정할 때 낙양 데신 관중(서안)을 적극 권장했다. 유방 측근의 상당수가 태행산맥 동쪽의 산동 출신들이라 새로운 도읍지로 낙양을 주장했는데 장량은 치밀한 지리적 지식과 이해관계를 내세워 유방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관중지역인 지금의 서안(西安)으로 도읍을 정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한 왕조가 병목 위기를 넘기고 안정된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장량을 도가의 양생술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유방의 한(漢)나라 개국 후 유방은 그의 장자 유영을 태자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총희 척희에게서 난 아들 여의에게 태자 자리를 넘겨주려고 마음먹었다. 유 씨 집안의 일이라 간여하기를 꺼려한 장량이었지만,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 나서기로 했다. 그는 황제 유방이 두고두고 만나기를 청했으나 만나지 못했던 은자 상산사호(常山四皓)를 초빙하여 태자 유영을 보좌하게 함으로써 유방의 폐   세자 계획을 단념시킨다. 그러나 그는 늘 세속을 떠나 고고하게 거닐면서 유유자적으로 지내고자 했고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전원으로 물러가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유방은 천하를 재통일한 다음 군신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자신이 천하를 얻고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을 물었다. 여러 의견을 듣고 난 다음 유방 자신이 말했다. ‘군대 막사 안에서 계책을 짜내어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에서 나는 장자방(장량)보다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수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양식을 보급하는 일에서 나는 소하만 못하다. 또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싸웠다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는 일에서 나는 한신만 못하다.’.

 젊은 날 장량은 진시황을 저격하려고 했고, 한때는 협객으로 까지 행세한 장량이 장수가 아닌 전략가로 변모한 것이다. 이는 그가 신비한 도인에게서 전수 받은 ‘태공병법(강태공의 저서)을 깊이 연구한 덕분이다. 장량을 잔병이 많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솔한 적이 없고 늘 계획을 내는 신하가 되어 항상 유방을 수행했다 그는 건강을 위한 양생법을 하면서 곡식을 먹지 않고 일 년이 넘게 두문불출하기도 했다. 어쨌든 장량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판단하여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그는 은퇴를 거론했고 끝내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는 권력자의 의심에서 벗어나 몸을 보전하는 한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디 현재 섬서 성의 유패 현에는 장량의 묘가 남아 있다. 그의 사당 안에는 이런 저런 유물이 있는데 지지(知止)라는 글자를 새긴 바위가 눈길을 끈다. 장량의 일생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멈출 줄을 아는 것‘, ’그칠 줄을 아는 것‘. 이것이 ’지지(知止)‘의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바위에 새겨진 ’성공불거(成功不居)‘는 공을 이루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지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젊은 날의 장량은 무모했을 뿐 아니라 거들먹거리며 협객으로 행세했다. 그러던 그가 도인을 만남으로써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다. 도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그 후 평생 욕심 부리지 않고 절제하며 살았다. ’지지‘의 경지를 터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의 병약함은 그에게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수련법이나 양생술, 그리고 단식 등으로 그의 정신세계는 더욱 더 청명을 더 해 간 것이다. 장량의 최후는 한신의 최후와 매우 달랐다.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사라진 장량의 마지막이 무미건조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명성은 2,000년이 넘은 오늘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나아갈 때가 언제이며 떠나야 할 대가 언제인지를 아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서, 집착에 못 이겨 욕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의 보통 사람들과의 대조된 모습을 보여준다. 나아갈 때를 알고 물러설 때를 알고 또 분수를 지킬 줄 아는 것이 쉬운 일 만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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