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양반의 나라였다. 진짜 양반이 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 하는데 그 과거 시험에는 사서삼경의 뜻을 얼마나 잘 알고 얼마나 잘 외우느냐 또는 시구를 얼마나 잘 짓느냐 하는 시험이었다. 사서삼경은 예와 명분을 강조해서 안 그래도 잘 먹고 잘 사는 양반 계층에게는 목에 힘을 주기 위해 배워야 할 학문이지만 전 국민의 90 % 이상을 차지하면서 하루 세 끼를 걱정해야 하는 양민과 천민에게는 생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큰 방해만 되는 학문이었다. 이 후 자본주의의 싹이 트는 18세기에 이르러 가난한 양반은 부유한 양민만 못했고 대신 부유한 양민이나 천민에서 몸값인 속량을 내고 양민이 된 천민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돈으로 양반까지 서서 양반 행세를 하는 바람에 원래 5-10 %에 불과하던 양반의 수가 30-40%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늘어난 양반들 간에는 권력욕과 더불어 감투욕 까지 사회적 병폐에 한 몫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양반은 가세가 기울어 제 때 밥을 못 먹어도 냉수로 배를 채워도 이를 쑤셔야 했으며, 추위가 와도 곁불을 쬘 수 없었다. 양반 행세란 바로 그 위선에 있었던 것이다. 양민이나 천민들이 외출을 나갔다가 양반 행차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멀리 비키거나 땅에 엎드려야 했으며 말을 타고 가다가도 양반 집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야 했으며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70평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없었다. 은수저를 쓸 수 없고 비단 옷이나 도포를 못 입고 가죽신도 신지 못했다. 천민의 딸은 시집갈 때 가마를 못 타게 해서 널빤지를 타고 갔으며 비녀도 꽂을 수 없었다. 조선은 담배 천국이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워댔다. 상민이라도 담배를 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반이 쓰는 장죽을 썼다가는 당장 끌려가 볼기짝이 터지게 얻어맞았다. 상놈은 한 뼘이 안 되는 곰방대를 써야했고 그것도 양반의 눈에 띠지 않게 허리춤에 깊숙이 꽂아야 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남을 시킬 줄만 알던 양반들 때문에 상민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원망만 품은 채 살게 되었고 온 나라가 무기력과 게으름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식충이 양반들의 행태를 벌레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일부 양반계층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이른 바 조선의 중. 후반기에 일어난 실학자들이다. 이들 중 대표적 인물로 이익, 박지원, 정약용을 비롯하여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이가환, 유득공, 서유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중에서도 홍대용은 만물박사라 할 만큼 폭 넓은 실학적 학문을 섭렵하여 이를 실생활에 접목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후 약간 늦은 나이에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1765년(35세 때) 숙부가 서장관으로 연경(북경)에 갈 때 군관으로 따라 가 연경의 현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사상적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홍대용은 북경에서 보고 들은 것이 모태가 되어 북학파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서양 과학에 몰두했던 그는 동양 최초로 지구의 자전을 주장했고 경제 정책의 개혁과 과거 제도의 폐지, 신분 차별의 철폐와 교육기회 균등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개혁안을 주장한 것이다. 그의 학문에는 천문, 지리, 수학, 음악 조예가 깊은 만능인으로서 사회 사상가이자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북경을 다녀 온 후 ‘을 병 연행록’을 썼는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한글로 되어 있다. 당시 북경에 관련된 여행기가 200편 정도인데 그 중에서 홍대용의 을 병 연행록이 단연 인기다 높았다.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코끼리나 낙타 이야기며 넓은 도로와 웅장한 건물, 진기한 풍물들이 폭 넓고 상세하고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다. 또 청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물 또는 뇌물로 사용된 품목이 조선의 청심환이었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의 청심환은 대부분 가짜였다. 따라서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 사신 단만 만나면 청심환을 달라고 조르는 광경이 홍대용의 연행록이 거의 매일의 일과로 등장할 정도였던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사신단 일행은 청국 사람들을 만나 부탁할 일이 있거나 어디 구경을 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청심환 한두 알을 집어 주어야 했으니 사신단 일행의 주머니 속에는 언제나 청심환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조선에서는 청심환을 나라에서 전매품으로 만들었던 까닭에 가짜가 없었으나 중국에서는 개인이 아무나 만들었기 때문에 가짜가 횡행했기 때문이다.
 조선인이 북경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유리청’이다. 이 유리청은 현대식 건물 벽에 설치 된 유리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경의 서점을 비롯해 붓, 벼루 등 선비들의 소요 물품이나 기타 진기한 물품들을 취급하는 거리 이름으로 당시로서는 없는 물건이 없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그 유리창에서 만나 사귄 선비들과 주고받은 필담들을 모아 편집한 ‘회우기’를 썼다 여기에는 그가 절강의 선비들인 엄 성, 육 비, 반 정균 등과 북경에서 만나 평생 우정을 쌓았다. 두 달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의기가 투합하고 뜻이 맞아 친 형제보다 더 깊은 우정을 주고받게 된 것이다. 그들은 헤어진 다음에도 조선과 청국을 오가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 편지들을 모은 것이 10여 권에 달한다.

 홍대용은 음악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중국 사신 일행에 끼어 청나라에 갔을 때 천주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처음 파이프 오르간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한 곡을 연주해낼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서양 악기인 칠현금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연주한 사람도 홍대용이다. 이렇게 음악을 사랑한 홍대용은 음악을 위해서라면 신분을 상관하지 않고 기꺼이 교유를 나누었다. 그가 주동이 된 실내음악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
 당시 조선의 선비사회의 시각으로 본다면 양반으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잡학에 심취한 홍대용이었으며, 뒤를 이어 그의 제자이자 평생 지기였던 박지원 또한 만물박사라 할 만한 잡학의 대가였다. 박지원의 삼종형인 박 명원이 청나라로 갔을 때 그를 따라 청의 건륭제 칠순 생일잔치의 축하 사절단 일행으로 가게 되면서 이 후 그는 실학자로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1780년 그는 청나라를 다녀 온 후 기행문인 열하일기를 썼으며 이를 통하여 청나라와 서양의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조선의 개혁을 촉구했다. 열하일기를 통한 박지원(연암) 문체의 독창상과 자유분방함에 매료되어 선비사회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오랑캐(청나라) 연호를 썼으며 우스갯소리로 세상을 유희했고 패관 문헌으로서의 엄숙함을 잃었다’는 비난 도한 만만치 않았다. 연암은 또 허생전, 호질, 양반전을 통하여 썩어빠진 성리학자들의 정치적 무능과 우물 안 개구리인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고 사회개조를 위한 이상과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