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조선 왕조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큰 오점을 남긴 비운의 역사가 있으니,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이 그것이다. 광해군 15년 3월 이 귀, 김 규, 김자점, 최명길, 이 괄, 이 서, 신경진 등 그 때 까지 눌려 지내던 서인들은 북인들의 폐모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능양 군을 추대하여 반정을 일으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 반정의 주모자는 이 귀와 김 류 이었고 훈련대장 이 홍립이 반정 군에 가담함으로써 반정은 싱겁게 성공했다. 이름이 좋아 반정이지 사실상 역모였다. 모처럼 성공한 역모의 주인공들이 하나 같이 썩어빠진 인물들이었다는 데에 조선사의 비극이 이어져 간 것이다. 반정에 성공하여 광해군과 그 아들을 연금한 반정 군은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찾아내어 서 궁에서 대비로 회복시켰다. 반정 다음 날 박 정길, 이 위경, 한 찬남 등 대북파의 인물들이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으며, 박 승종, 이 이첨, 정인홍, 그리고 광해군의 후궁 김개시도 자살하거나 처형되었다.
 이 처럼 성공한 반정에서 이들이 내세운 반정의 명분이 암만해도 궁색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광해군이 명나라에게 배은망덕하고 오랑캐(後金의 누르하치)에게 성의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는 광해군이 청(후금에서 나중에 靑으로) 과 명(明)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친 것을 죄악이라 지적했다. 그래서 반 청 친명을 떠들어 대며 주제파악 상황 파악을 못한 이 반정 군들이 결국 그들이 받들어 모신 인조로 하여금 삼전도에 나아가 오랑캐의 왕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수모를 겪게 하고 항복하게 하는 치욕을 자초한 것이다. 또 다른 반정의 이유로 민가 수 천 채를 헐어 궁궐을 지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광해군은 왕실의 존엄을 세우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불 타버린 창덕궁, 창경궁을 재건하려 한 것을 꼬집고 나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폐모 살 제(廢母殺弟)로 인목대비를 폐하고 광해군의 아우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이유다. 폐모 살 제가 사실을 적시한 일이지만 권력의 승계 과정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를 역모의 타당성으로 몰고 가는 것은 너무 적반하장인 주장이다. 이런 반정의 이유들은 승자의 요란한 외침일 뿐 내용은 엉터리를 꿰어다 맞춘 궤변일 뿐, 실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조선을 재건하기 위한 광해군의 개혁에 밀려 난 세력과 서인들이 일으킨 역모이었다. 무엇보다 반정이 없었더라면 조선 최대 치욕인 청일 전쟁과 삼전도 항복은 없었을 것이다.

 인조에게 밀려 난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던 1,618년 명에서 후금과의 전쟁에 필요한 지원병을 요청했을 때 파병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 우리는 아직 왜란으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명도 누르하치(후금)를 당해내지 못했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당하랴. 우리의 훈련되지 않은 군대를 보내봤자 양떼를 몰고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파병은 민생을 파탄시킬 뿐 아니라 누르하치와 원한을 맺게 될 것이 뻔하다’ 라는 이유를 들어 1년이 되도록 미적거리다가, 강홍립에게 13,000명을 주어 지원군을 보내었다. 강홍립은 명이 후금의 상대가 아님을 보고 후금에 항복한 후 조선의 참전이 자의가 아님을 알리고 그들을 안심시킨 뒤 후금의 진영에서 광해군에게 계속해서 밀사를 보내었으므로 조선은 그 곳 사정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강홍립은 밀서를 쓴 다음 새끼를 꼬아 그 속에 밀서를 넣어 보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광해군의 노력이 후일 반정의 핵심의 구실이 된 것이다.   
 위의 인조반정도 혁명의 한 사례지만, 이 혁명은 끝없는 변화를 가져오는 한 편의 드라마이며 우리를 전율시켜 긴장시키는 놀라운 일로 늘 대기하고 있다가 불시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원래 직업 정치가의 정치는 용의주도하게 둘러쳐진 장막 속에서 행해지며, 갖가지 죄악이 숨겨져 있고 그들의 품위 있는 말씨 속에는 들끓는 야심과 욕망이 숨겨져 있다. 이러한 욕심과 야망 때문에 수많은 국민들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 억울함 속에서도 그들의 비열함과 음흉함이 가리어진 채 넘어가고 있다. 그들이 우리들의 귀에 들려주는 것이라곤 그 비열함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숭고한 이상이나 생명적 희생을 요구하는 대의명분, 이런 것들   뿐이다. 일반적으로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말로써 흉악한 음모나 비열함을 치장할 능력도 세련미도 없다. 인조반정과 같은 역모가 아닌 혁명에 있어서는 그것이 현실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그 배후에는 배고픔으로 쪼그라  든 인간들의 텅 빈 배와 창자가 그 원동력인 것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굶주린 프랑스의 혁명군들은 1,789-1,794년의 5년에 걸친 투쟁 끝에 결단력 없던 정치꾼들의 손을 비틀어 군주제를 철폐케 하고 봉건제도와 교회의 특권을 박탈시키게 만들었다. 혁명군은 그 옛날 죄 없는 국민들을 짓밟던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단죄하였으며 혁명을 막기 위해 급속하게 편성 된 군대에 참가하여 한 패거리가 된 유럽의 정규군을 격퇴하였다.

 무서운 긴장과 분규의 몇 년을 보내는 동안 프랑스 국민이 기적을 일궈 낸 것이다. 그러나 혁명군은 이제는 같이 피땀을 흘린 자신의 동지에게 창끝을 돌려 여력을 탕진하기 시작했고 혁명은 헛되이 무너져 내렸다. 참담한 고통 속에 그처럼 분투해 왔던 평민들을 새로운 압박자에게 짓밟히게 만든 반혁명이 닥쳐 온 것이다. 반혁명 속에서 독재자로 황제가 된 인물이 나폴레옹이다. 하지만 반혁명도 나폴레옹도 민중을 옛날로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아무도 혁명의 주요 성과를 없애 버릴 수는 없었으며 프랑스 국민은 물론 다른 여러 나라 어떤 국민들로 부터도 국왕의 목이 날아가던 그 날의 감격을 뺏을 수는 없었다. 루이 16세에 이어 절대군주를 받들겠다는 허황된 꿈을 지닌 왕당파에다, 헌법을 만들어 국왕을 제한 군주로서 존속시키겠다는 온건 자유주의파도 생겨나고, 그 외에도 몇 몇의 파당이 생겨났다.
 혁명의 결과로 의회에 상정 된 안건으로는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대 귀족과 교회의 우두머리 까지 자진해서 국민회의에 참석한 가운데 이를 통과시켰다 이 국민회의의 결의 상 농노제도와 이에 수반한 여러 특권, 봉건 법정, 귀족과 성직자의 조세 부담 면제 철폐, 귀족의 호칭 철폐 등이 통과 된 것이다 이어 이들은 또 역사적인 ‘인권선언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방대한 교회 재산이 국고로 몰수 되었고, 종전의 봉건 법정이 아닌 민주적 재판소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 모든 개혁이 좋은 일이기는 했으나 빵에 굶주린 도시민과 토지에 주린 농민들에게는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 혁명은 파리 시민들이 주도하면서 지지했지만 후방에 쳐진 농민들은 이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들 농민들을 혁명군에 가담시키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여 프랑스 서부에서 대규모 농민 폭동으로 확대되었다. 이 폭동을 진압하는 데는 매우 잔인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혁명은 이처럼 새로운 개혁을 수반하면서도 그 이면에 가리어 진 새로운 적폐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우리는 잊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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