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조선의 개국에 대하여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우리겨레의 시원을 단군에 두고 있으면서도 이를 아득한 옛 날 있었던 신화적 사건으로만 해석하여 ‘단군’과 ‘고조선’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그 역사적 발자취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필자 보다 앞선 세대의 이른 바 한학(漢學)을 했다는 어른들에 의하면 한결같이 ‘단군 천년, 기자 천년, 신라 천년, 고려와 조선 천년’이라고 알고 있으면서, ‘역사(歷史)’ 라 하면 으레 공자의 저술인 춘추(春秋) 또는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를 줄줄 외면서도 그들의 머리에 우리 역사가 비집고 들어 설 자리조차 없었다. 우리의 앞 세대들은 조선시대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들의 후예였으니 어느 정도 이해되는 면이 없지 않으나, 문제는 해방된 지 70년이 지나고도 후세대들에게 이런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고대사를 가르치고 있으니 통탄, 통탄, 또 통탄 밖에는 할 말을 잃게 만들고 있는 것이 한국 역사 교육의 현주소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과 수 천 년 간 서로 어울리거나 이웃하여 살아왔던 거대한 이웃, 중국과의 연관성을 지워낼 수는 없다. 우리의 기록(기원) 역사는 기원 전 7197년 환인이 통치한 환국(3301년간)에 이어 환웅이 다스린 배달국(1565년간)이 있고, 이어 단군조선(47대 2096년)으로 이어지는 7천년에 이르는 고대사(고 조선사)가 있는데, 이 중 중국사에 중요한 획이 되는 요(堯)임금부터, 순(舜), 임금, 그리고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에 해당하는 시기에 우리의 배달국과 단군조선이 교체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우리의 단군조선이 중국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황제(黃帝) 헌원의 증손자 제곡 고신이 죽은 뒤 지(摯)가 제위에 올랐으나 정사를 잘 못 처리한다하여 밀려나고 이어 요(堯)임금이 제위에 올랐다.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선포한 것은 요임금이 집권한지 25년 되는 기원전 2333년 일이다. 이 단군조선이 2096년간 통치하는 기간 중 47대에 이르는 단군이 통치했으니 왕검단군(1대 王儉檀君), 부루단군(2대 (扶婁檀君), 가륵단군(3대 嘉勒檀君),....고열가 단군(47대 高列加檀君)등이 그 순서이다. 왕검단군은 배달국 마지막 천황인 거불단 환웅(居弗檀桓雄)때 비왕(裨王)으로 섭정하고 있다가 정식으로 황위를 선양받아 제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단군이 최초로 도읍한 아사달은 지금 하얼빈의 완달 산이고 송화 강 근처에 있다. 단군왕검이 배달국 신시의 옛 법규를 되찾고 아사달을 도읍으로 하여 조선을 세웠다 함은 단군조선이 배달국의 제도와 문명을 그대로 이어 받았음을 말해 준다. 고시 씨(高矢氏)는 배달국 때부터 농사를 관장해 왔던 데서 만민이 끼니를 거르지 않게 되었음을 감사한다는 표시로 ‘고시례’ 또는 ‘고수레’를 외치면서 들에 나가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기원 전 2284년 홍수가 크게 나자 단제(檀帝)께서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여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니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슬기롭게 홍수에 대처하고 있던 단군조선에 비해 중원의 요(堯) 임금은 그 홍수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당하는 고통을 사기(史記)와 서경(書經)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 ! 사악(四岳)이여, 홍수는 넓은 땅을 뒤덮고 질펀한 물은 산을 잠기게 하며 언덕 위에 오르는 거친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아래로 백성들이 이를 한탄하고 있는데 이를 누가 다스릴 것인가 ?’ 하고 요임금이 신하들에게 묻자 모두 곤(鯤)이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이리하여 곤이 책임자가 되어 9년이나 걸려 홍수 다스리는 데 애를 썼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舜)임금은 제위에 오르자 즉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에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응답하여 단군조선은 중원의 모든 제후국들에게 소집령을 내려 도산(塗山 지금의 산동 반도 부근)에 모이게 하였으니 이를 도산회맹(塗山會盟)이라 한다. 단군왕검은 맏아들인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회맹을 주재하도록 하였고 이에 순임금은 치수에 실패한 곤의 아들 우(禹)를 파견하였다. 이에 부루 태자는 순임금이 보낸 우에게 단군조선의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이라는 신서(神書)를 전수해 주었고 우는 이를 기본으로 치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 사서들은 우(禹)가 상국 대표로 회의를 주재한 것처럼 거꾸로 적어놓고 있다. 치수에 성공한 우는 그 공로로 제위를 물려받아 하(夏)나라를 세우게 되었고 그를 하후(夏候) 또는 하우(夏禹)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루 태자는 오행 치수 법을 전수한 다음 순임금과 나라의 경계를 새로 정한 후 회대(淮岱 지금의 泰山 근처)지방 제후들로 하여금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그 감독하는 일을 순임금에게 맡겼으니 그 회대지역이란 지금의 양자강 근처와 회수(淮水) 근처를 말한다.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舜)은 원래 단군조선 사람이었다. 요임금은 단군왕검과 동 시대에 재위하다가 순임금에게 제위를 선양(禪讓)하였다 하여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순임금 또한 치수에 성공한 우에게 선양하였다. 요와 순은 중국사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다. 요, 순, 우가 모두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들이지만 우리의 고기(古記) 중 하나로 중종 때 춘추관으로 있던 이맥(李陌 固城李氏)이 고대사를 정리한 태백일사에 의하면 ‘요(堯)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천황(檀君)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사들과 함께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그리고 단군조선과 순이 함께 요를 치기로 약속하니 요는 지탱하지 못하고 순에게 의지해 두 딸을 순에게 바치고 목숨을 보전하고 나라를 넘겨주었다. 이에 순의 부자가 형제와 다시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효제(孝悌)가 근본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요임금이 덕망이 높아 순에게 양위한 것이 아니라 요임금 말기에 정치가 날로 쇠퇴하여 덕을 잃자 각지에서 소란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단군조선에서는 군대를 보내 순으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도록 한 것이다. 중국 고대신화는 이 대목을 이렇게 말한다.‘요임금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단주(丹朱)는 사람됨이 거만하고 포악하며 게으르고 늘 놀기만 좋아했다. 그리하여 요임금은 단주를 남방의 단수(丹水)로 추방하고 그 곳에서 제후 노릇을 하며 살게 하였다. 당시 남방에는 삼묘족(三苗族)이 살고 있었는데, 요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하자 단주는 이들 삼묘족과 힘을 합해 반란을 일으켜 부자간에 전쟁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싸움에서 요임금이 모두 승리하였다.‘ 위의 기록은 요가 수신제가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군주였으며, 단주가 방탕하였다면 다른 아들을 후계자로 정할 수 있었을 것인데도 굳이 순에게 제위를 물려 준 것은 요임금의 의사가 아닌 상국 단군조선의 의지였음을 말해 준다.

 이 순(舜)의 아버지는 고수(瞽叟)이며 장님이었고, 일찍 순의 어머니가 죽어 고수는 후처와 함께 살았다. 후처와의 사이에 상(象)이라는 아들(순의 아우)이 있었다. 아우인 상은 늘 형인 순을 죽일 궁리한 하고 있었다. 순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왕위에 오른 뒤 까지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 효에서 나온다는 기본 덕목을 실천한 것이다. 고대 우리 조상의 나라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이 지금 중국의 상국이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우리 역사바로잡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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