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전쟁, ‘전쟁’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하고 창피한 전쟁, 그것이 조선 인조 때의 병자호란이다. 전쟁 후 청에서는 궁중의 시녀로 조선의 처녀들을 요구했다. 청은 그 시녀들을 시녀로 쓰고 나머지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보내어진 처녀의 수가 수 천 명이 이르러 나중에는 천민, 관기, 기생들을 보내었으나 이를 안 청에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포도청에서는 처녀란 처녀는 눈에 띠는 대로 잡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런 난장판이니 전국에 곡성이 울려 퍼지고 처녀들은 안 잡혀 가려고 머리를 깎고 얼굴에 상처를 내고 서둘러 조혼을 했다. 이리하여 청에서 노예로 살다가 목숨을 걸고 청에서 탈출하여 고국 땅을 밟은 여인들은 몸을 더럽혔다며 손가락질 하는 가문과 남편들의 반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는 일이 빈번했다. 나라의 전쟁이 나고 안 나고를 어느 특정인 한 사람에게 돌리기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그 탓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은 바로 인조임금 자신이고 그 다음으로는 당시 최고의 권력과 영화를 누렸던 김자점(金自點)이다.
 인조반정의 공신 김자점은 안동김씨로 사육신의 모의를 고발했던 김질의 후손이다. 반정은 거사 몇 달 전 이 귀, 김자점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제보가 광해군의 귀에 들어갔지만, 이미 이이첨 등이 수차례에 걸쳐 역모를 고변하여 역모사건 자체에 질려있던 광해군이 이를 소홀히 한데서 반정이 성공으로 매듭 지워진 것이다. 김자점은 성질이 모진데다 사나웠고 일 처리도 급하여 사람들이 호랑이처럼 무서워했다. 그는 성질만 급한 것이 아니라 경망스러웠고 학문이나 무예도 없는 사람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있는 동안 각 지역의 군대가 합류했다. 모든 군 지휘관들이 포위한 적의 배후를 치자 하는데도 김자점은 병력이 적다며 이를 거부했다. 전쟁이 끝난 후 도원수 김자점은 왕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그에게 탄핵이 빗발쳤으나 중형 대신 섬으로 유배되는 데 그치고, 2년 후 유배가 풀려 강화유수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신료들은 명을 추존하고 청을 비하하는 데 반해 김자점은 청을 추존하는 신료이니 청의 눈치를 보아 극형에 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김자점의 안부를 물었고, 조선에서 사신 단이 청으로 갈 때면 반드시 김자점을 넣어 주니, 모두가 그를 청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는 또 윗사람에게 아부 잘하는 천부적 재주가 있어 그리 영민하지 못한 인조에게 큰 총애를 받았다. 김자점은 인조의 비위를 철저히 맞춘 덕에 영의정이 되고 효명공주를 손자며느리로 맞이하면서 왕을 제외하고는 권력의 정상에 있었다. 조정은 온통 그에게 뇌물 바치는 사람으로 들끓었고 그의 사치 도한 극에 달하였으나 왕의 총애가 무서워 아무도 탄핵하는 사람도 없었다. 왕의 후계자 옹립에서도 김자점은 봉림대군(효종)을 태자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어 효종이 즉위하자 송 길준을 포함한 많은 신료들이 김자점을 성토하고 나서자, 처음부터 부패척결과 북벌을 계획하고 있던 왕으로서는 비록 자신의 왕위 옹립에 공이 있다 하더라도 단호히 김자점을 처벌하여 유배시키고, 다시는 등용하지 않았다.

 진시황 시대에 환관이면서도 크게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 조고이다. 비천한 신분인 그가 노력가이며 형법에 정통하다는 이유만으로 황제의 눈에 들어 중거부령으로 등용이 된 것이다. 조고는 등용되자 공자 호해에게 접근하여 소송 및 재판의 진행 방법을 가르쳤다. 조고가 중죄를 저질러 중형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나 시황제가 관대히 용서해 주었다. 조고는 시황제가 죽자 자기가 가르친 호해를 후계자로 옹립하고 싶어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서신과 옥새를 장악하고 공자 호해에게 다음과 같이 흥정을 걸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만 장자인 부소에게 서한을 내리셨을 뿐이고 어떤 공자를 왕으로 봉한다는 조칙은 없었습니다. 그대로 사태가 진전된다면 부소가 돌아와서 황제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공자님에게는 한 치의 땅도 주어지지 않을 것인데 그래도 무방하시겠습니까 ?’ ‘좋고 나쁘고 가 어디 있겠소. 어진 임금은 신하를 알고 어진 아비는 아들을 안다고 하지 않소. 부황께서 돌아가실 때 까지 공자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 대해 따질 것이 없을 것이요’.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천하의 권력을 얻느냐 잃느냐의 여부는 공자님과 저, 그리고 승상 이렇게 세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남을 신하로 삼느냐 남의 신하가 되느냐, 남을 지배하느냐 남에게 지배를 받느냐, 어느 족을 택하느냐에 따라 천지의 차이가 생깁니다’. ‘천 부당 만부당한 소리요. 형을 폐하고 아우가 그 자리에 아우가 올라가다니 부황의 조칙을 무시하고 제위에 올라 형사(刑死)의 공포를 스스로 초래하다니, 재능도 없는 주제에 남의 농간에 좌우되어 높은 자리를 넘보는 것, 이런 불효, 불의, 분에 넘치는 악덕을 쌓아 가지고 천하가 굴복하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해일 것이오.’ 여기까지의 대화만으로는 호해가 조고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는데 끈질긴 설득 끝에 호해의 승낙을 얻고, 다음으로는 승상 이 사의 승낙까지 얻어 시황제의 장자 부소를 제쳐두고 호해가 2세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리고 조고는 황제에게 진언하기를 황제가 신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황제로서의 권위에 손상이 온다는 이유로 젊은 황제는 따로 마음껏 즐기고, 정사는 사실상 조고 혼자서 독단하였고, 가끔씩 조고가 결재를 받는답시고 황제를 알현하곤 했다. 또 거추장스러운 승상 이 사를 모함해 죽이고 자신이 승상이 되었다. 2세 황제를 세우면서 처음부터 모반할 마음이 있었던 조고는 모든 신하들을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하기위해 우선 그들을 떠 보기로 했다. 조고는 황제에게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이것은 말(馬)이옵니다’. ‘승상(조고)이 돌지 않았나 사슴을 보고 말이라니’. 그러자 신료들은 아예 입을 다무는 파, 조고에게 아부하여 사슴이라고 허는 파, 그리고 황제의 편을 들어 솔직히 사슴이라고 하는 세 파로 나뉘었다. 자리가 파한 다음 조고는 어전에서 사슴이라고 말한 신료들에게 죄목을 씌워 다 처형해 버렸다. 그러자 모든 신료들은 조고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되었다. 나라의 형편은 진승과 오광의 봉기 이후 수많은 군웅들이 그 뒤를 이어 봉기하고 이미 관군은 힘을 잃어 도저히 진압할 힘을 잃게 되자 조고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에 앞서 민심을 돌려 보고자 호해를 무력으로 끌어내리고 공자 자영을 왕위에 올렸다. 진나라의 막 내림이 초읽기에 들어 간 것이다. 전국적으로 할거한 군웅 중에서 가장 세력이 좋았던 항우를 제치고 유방이 함양 궁에 먼저 입성함으로써 진나라는 그 막을 내렸고, 조고의 영화도 끝났다.

 역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본보기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고, 그 중에는 자신이 닮고 싶은 인물(role  model)이 있는가 하면, 참으로 가증스러운 인물들도 있다.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하는 모든 사례들은 자신이 주인임을 잊어버린, 스스로 종이 되어 살아야 할 인간 군상들이 가당치도 않는 윗자리에 앉아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수 십   세기에 걸쳐 옳고 그름을 설파하는 외침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