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의 백제 지원군이 백강 구 에서 패한 이후 백제 유민들도 대거 왜국으로 건너갔다. 지금 현대식 도로가 나 있는 오오사까 세공곡(細工谷)엔 원래 백제니사(百濟尼寺)라는 거대한 사찰이 있었다. 오오사카 주민들의 문패에는 백제라는 성씨의 문패도 상당히 많다. 백강구 전투 이후 새로운 수도가 된 오오츠시에는 사이메이 천황의 아들 텐지(天智) 천황을 모신 오미신궁(近江神宮)이 있다. 오미신궁 앞에는 일본 최초의 해시계와 물시계가 있으니 모두 백제 망명인 들의 작품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400명의 백제 유민들이 병법, 의학 등 각 분야별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왜국의 대학에 해당하는 권학당(勸學堂)에서 왜인들을 가르친 사람들도 모두 백제인 들이다. 시가 현 석탑에서도 당시 백제 인이 만든 석탑과 불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백강구 전투 이후 폐쇄적인 정책을 펴던 왜국은 율령 체제를 정비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이것이 곧 백제와 왜의 친밀한 외교관계의 결실이자 백제 멸망 이후에도 일본에서 선진 문화를 꽃피운 백제인의 힘으로만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사실상 일본 문화의 정수는 일본에 있는 백제문화에서 찾아야 할 일이다.
이제 이야기를 약간 되돌려 백제 지원군 왜군의 백강구 전투의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전북 부안군과 김제군 사이를 흐르는 동진강은 지금 계화도 간척지 공사로 강폭이 좁아졌지만 약 1,400년 전(663년 8월)에는 4km 정도로 넓었다 한다, 이곳이 바로 나. 당 연합군과 백제와 왜국의 연합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일본의 서기는 이 날의 전투를 이렇게 묘사했다. ‘당의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 강에 진을 쳤다. 일본 수군 중 처음 온 자와 당의 수군이 교전을 벌였다. 일본이 불리해 물러나자 당은 굳게 지켰다’. 첫 전황에 대한 기술이다. 당시 백제 무왕의 조카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류성을 거점으로 저항했다. 백제 부흥군의 수장이던 복신이 사신을 보내 당시 왜에 거주하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夫餘豊)을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귀국한 부여풍이 왕으로 추대되면서 본격적인 백제 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전북 부안군 상서면 능가 산의 울금 산성이 당시 백제가 부흥 운동을 하던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곳에는 둘레가 4km가 되고 수구(水口)가 한 곳 밖에 없어 은폐와 방어에 좋은 조건이었다. 부흥군은 이곳에서 3년간 버티었는데 당시 부흥 군이 썼을 우물과 왕궁 터로 보이는 축대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부흥군은 663년 부여 풍과 복신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복신과 부여 풍 사이에 시기 질투가 일어 난 것이다. 복신은 병을 구실로 굴속에 누워서 부여 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렸다가 죽일 계획을 했지만, 이를 미리 알아 낸 풍이 복신을 급습하여 복신을 죽였다. 부여 풍이 수하 장수 복신을 죽인 것을 알게 된 신라가 주류성을 빼앗으려 했고 이에 왜군 27,000명의 지원군이 신라군을 공격했으나 그들이 출병한지 보름 만에 나. 당 연합군의 반격으로 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가 왜군을 맞아 네 번 싸움에서 모두 이기고 군선 400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다 또한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 풍은 이 전투 이후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사실상 백제 최후의 전투였던 것이다.
당시 백제는 이미 망했고 백제의 부흥 군이 저항 운동을 벌이는 정도였는데 어째서 왜국이 대대적인 지원병을 보냈을까 에 대해 일인들은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침략적 근성을 드러내 보이지만, 실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이 왜국의 지원군을 끌고 왔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백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왕자들을 왜국으로 보내어 선진 백제 문물을 전하고 그 답례로 수차례에 걸쳐 백제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 왔던 종전의 관례를 따른 것이고, 게다가 신라계의 다이카이(大和) 정권에서 다시 백제계 정권으로 복귀할 때 백제계 세력의 절대적 지원을 받은 사이메이 천황이 부여 풍을 지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