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고대로부터 무던히도 우리겨레를 괴롭힌 종족인 왜구, 그들이야말로 혈통 상 어느 누구에게도 못 지  않게 우리와 가까운 동족이다. 우리의 단군조선 시기 까지만 해도 거의 텅 빈 불모의 섬나라 왜국은 지금의 중국 대륙에서 왜국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 한반도는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삼국시대에는 그 일부가 고구려, 신라, 발해를 거치기도 하였지만 주로 백제 가야 등을 거쳐 간 사람들이 많았다. 이 이민행렬이 수 천 년에 걸쳐 끊임없이 줄을 이어 오는 가운데 고려 말에 이르러 대대적인 이민 행렬이 아닌 이민 군단이 한반도를 휩쓸어 가면서 나라가 흔들릴 정도의 큰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고조선 때 까지 우리의 영토였던 지금 중국의 요동 반도, 산동 반도, 대만에 이르는 지역이 삼국시대 까지는 우리 땅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그 실질적 통치권을 당에게 넘겨   주고 신라방(新羅坊)이라는 미약한 형태를 유지해 오다가 흐지부지 그 강역이 흐지부지 우리 손에서 떠나 버렸다. 고려 말에 이르러 중원 땅에 한족(漢族)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이전의 고조선 후예인 요(療), 금(金), 원(元)등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그 오랑캐들의 뿌리를 뽑는다는 미명 아래 철저하고 대대적인 우리 동이족(東夷族) 색출 작전에 들어가 이들을 학살 또는 추방하니 이 때 많은 고조선 후예들이 추방되었으니, 그들이 남쪽으로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으로 추방되었고, 동남쪽으로는 조선(고려)으로 대대적인 민족의 이동이 이루어졌으니 이들이 당시 주로 서해안 지역에 자주 출몰한 왜구의 주요 실체 중 하나이다.
 당시 일본의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천황가가 두 갈래로 분열되면서 교토(京都)의 교모(光明)의 천황과 요시노의 고다이고 천황으로 나뉘게 되었다. 당시의 무사들도 두 왕조를 따라 분열되었으니 한 집안 내에서도 두 계파로 분열되어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본 역사상 혼란기였던 남북조 쟁란 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오구리 시의 오오히라 전적지에는 이 남북조 시대 최대의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기쿠치 군에게 패한 쇼니 군은 많은 군사들을 먹여 살릴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사방으로 나가 약탈을 일삼게 되니 이들이 또한 한반도에 출몰한 왜구들인 것이다. 이 혼란기에 이들 쇼니의 군대만이 아닌 수많은 영주들의 군단들이 무장을 갖추고 고려로 쳐들어와 군수물자 비축을 위한 약탈에 가담했다.

 1,350년 충정왕 때 왜구들이 거제와 고성 등 남해안 지역을 대규모로 침입한 때가 왜구 침입의 시초다. 그들은 고려 조정에서 만든 해안 지역의 조창(漕倉)이 왜구들의 주된 약탈 대상이 되자 이 조창을 해안 지역에서 내륙으로 옮겨야 했다. 조창이 내륙으로 옮겨지자 왜구도 내륙으로 깊숙이 침입했다. 광양만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하동, 산청, 화개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 온 왜구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관아까지 습격했다. 왜구는 더욱 기승을 부려 1,377년 강화를 점령했다. 왜구들이 노린 것은 쌀과 재물만이 아니었다. 완산주의 임씨 부인은 왜구의 겁탈에 저항하다 팔다리가 잘리고 살해되었다. 영암의 최씨 부인은 왜구들이 쫓아오자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피했으나 결국 잡혀 죽임을 당했는데 갓난아이가 어미젖을 빨다가 죽어갔다. 왜구들은 서너 살짜리 여자 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어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 먹었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있다. 왜구의 잔인성은 당시 일본이 내란 중이던 상황에 연유한다. 전쟁이 가치관을 뒤흔들어 여자를 겁탈하거나 약탈, 방화하는 정도는 양심의 가책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구가 주로 노린 것은 부녀자 보다 젊고 힘 센 장정들이었다. 왜구들의 또 다른 목적물은 고려의 값진 문화재였다.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된 대마도 관음사에는 당시 고려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당시 식량을 탈취하러 왔던 왜구들은 원래 불상 같은 것을 대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것을 일본에 가져가자 일본의 토호들이 귀중한 유물이라며 비싼 돈을 주고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문화제가 재물이 되고 귀하게 취급되자 고려의 문화재를 더욱 약탈해 간 것이다. 지금은 국내에서 구하기조차 어려운 남아 있는 고려의 불화 90%는 일본에 가 있다. 왜구들이 노린 것은 결국 경제적 가치가 있는 쌀과 사람 그리고 재화이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40년 간 고려가 입은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왜구들이 남긴 피해는 천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다.
이들 왜구 중 1,380년 홍산으로 침입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는 견고한 갑옷에 얼굴에 동면구(銅面具)를 쓰고 있어 화살이 박힐 틈이 없었다. 도쿄의 유치관 박물관에는 일본 무사 복장이 각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는데 고려 말에 해당하는 14세기 무사의 복장이 고려사의 기술과 일치하고 있다. 말을 타고 호위병을 거느린 완전 무장의 이 왜구는 단순한 해적 수준이 아니다. 온 몸에 갑옷을 두르고 철가면을 썼으니 황산 싸움에서 고려 병사들이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왜장 아지발도는 끄덕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 고려군의 토벌대장 이성계는 달리는 말에서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맞추어서 투구를 벗겼다. 연이은 화살이 적장의 얼굴에 박히면서 고려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김천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지금의 3번 국도는 고려 때부터 전해 오는 왜 넘이 재로 1,380년 진포에서 패한 왜구들이 옥천, 영동 김천을 지나 상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운봉에서 패한 후 무등산의 험준한 규봉암(圭峰菴)을 최후 은거지로 선택했다. 1,376년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왜구는 지금의 충남 부여군 홍산면 태봉  산에서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과 만났다. 환갑을 넘긴 최영은 화살을 맞고도 앞장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산 정상에 이르면 당시 일본 무사들이 이 지형을 얼마나 잘 이용했는지를 말해 준다.

 고려 말기는 참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오랫동안 고려를 괴롭혀 오던 몽골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고 왕궁을 불태웠다 한 편 남쪽에서는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민심이 피폐해 지는 등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들 왜구를 막기 위한 수군이 창설되기에 이르렀고 화포가 개발되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화통도감(火㷁都監)에서 화약 뿐 아니라 대장군, 이장군, 석포, 신포 등 각종 화기를 연달아 개발해 내었다. 1,380년 8월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의 100척 선단은 왜선 500척을 격파함으로써 왜구전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 화포라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고려군은 이어 남해의 관음포에서 정지(鄭地) 장군이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명나라에서 추방된 우리 동이족(교포)들이 고려로 몰려들었다가 내침한 왜구들의 침략 도구로 전락하거나 당시의 고려,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최영이 주도한 요동 정벌에 대해 이성계가 제시한 여러 가지 불가 요인 중 하나가 왜구의 침입인데, 명나라에서 온 동족들을 군에 편입시켜 요동정벌에 동원함으로써 사실상 왜구의 발호가 잠잠해졌다는 점에서, 이성계의 요동정벌 불가론 중 ‘왜구의 침입’은 말도 안 되는 논리였고 실제로 요동정벌군이 발진한 후 왜구 침입은 사라졌다. 
 강한 국방력 없이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 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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