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내 생각과 타인의 충언, 이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는 딱 잘라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기 기분대로 통치한 연산군과 은(殷)의 주왕(紂王)은 정권과 나라를 잃었고, 또 간신 조고의 말만 듣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던 진(秦)나라의 2세 황제 호해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나라를 망했다.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가는 상황에 따라 현명한 선택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선택에 일률적인 기준을 두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말했다. ‘옛날부터 제왕들은 자신의 감정대로 행하는 자가 많았다. 기분이 좋을 때에는 공적이 없는 자에게 까지 상을 주고 화가 났을 때에는 태연하게 아무 죄도 없는 자 까지 죽였다. 천하의 대란은 모두 이런 원인으로 일어난 것이다. 나는 밤낮으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 자, 어떤가, 나에게 대해 간언할 것이 있으면 지체 없이 얘기해 주기 바란다. 또, 너희들의 부하들의 의견은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좋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거부해서는 안 된다. 부하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상사에게 간언할 수 있겠는가 ?’. 그는 또 신하 위징(魏徵)에게 말했다. ‘요즈음 신하들 사이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자가 전혀 없다는데 대체 어찌된 일이냐?’ 하문을 받은 위징이 답했다. ‘폐하는 허심탄회하게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서슴없이 의견을 말하는 자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는 것에도 사람들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의지가 약한 자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합니다. 평소 폐하의 측근에서 보필하지 못하는 자는 신뢰가 없음을 두려워해서 함부로 말하지 못합니다. 지위에 연연하는 자는 어설프게 말했다가 모처럼 얻은 지위를 잃게 될까봐 이 또한 적극적으로 발언하려 들지 않습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과연 네가 말한 대로다. 나는 언제나 그 점을 반성하고 있다. 신하가 군주에게 간하려면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형장(刑場)에 나아가는 것과 같고 적진 한 복판에 돌입해 가는 것과 같다. 나는 앞으로도 겸허한 마음으로 간언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쓸데없는 걱정 말고 서슴없이 얘기해 주기 바란다.’ 태종은 일생을 이와 같은 생각으로 폭넓게 신하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다. 아랫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 속에는 간언하는 아랫사람들이 반드시 현명해야 함이 그 전제가 된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죽은 후 항우와 유방은 천하를 두고 싸웠다. 이 두 사람의 싸움에서 처음에는 항우 쪽이 월등히 우세했다. 유방은 그 약세를 끈질기게 만회하여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는 천하통일 후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장량, 소하, 한신이라는 걸출한 인제가 있다. 이 세 명을 잘 활용한 것이 내 승리의 원인이다. 이런 나에 비해 항우에게는 범 증이라는 참모가 있었지만 그 한 사람조차 활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항우의 패배 원인이다.’ 이 세  명의 활용이 이들을 혹사시켰다는 말이 아니고, 이 세 명의 말에 진심을 기울여 들어주었다는 말이다. 유방 쪽에서 지시나 명령을 내리는 일은 거의 없고 부하들의 진언을 진지하게 듣고 숙고 끝에 채택하여 승인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을 취함으로써 진언을 올린 신하들도 그 책임을 느끼고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오자서라는 사람은 초나라 출신으로 초를 버리고 오나라로 망명한 사람이다. 초의 평 왕이 부 시중 비 무기를 진나라로 보내어 며느리 감으로 그 곳 공주를 보러 가게 되었다. ‘ 그 곳 공주는 절세미인입니다. 공주를 폐하의 비로 삼으시고 며느리는 따로 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 무기의 보고에 따라 진의 공주를 왕후로 맞아들이는데 반대한 오자서의 부친과 오자서의 형(오상)이 처형당하고 그는 망명길에 올라 송나라와 정 나라를 거쳐 오나라에 이른 것이다. 오나라의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오자서에게 구원의 손길이 이르렀으니 새로이 왕위에 오른 합려가 그를 고문으로 등용함으로써, 나라의 부를 축적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해 나갔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합려는 초나라 공격에 나서게 되었고 여기에 출전한 오자서는 대승을 거두었다. 초나라에게 대승을 거둔 오나라는 이어 월나라를 공격하여 또 대승을 거두었다. 명장 출신이 합려와 병법의 대가 손 무, 그리고 명신 오자서까지 합류했으니 아무도 오나라의 공격에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초나라가 처 들어 오자 오자서가 출전하여 이를 격파한 다음 여세를 몰아 초나라 수도인 영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오자서는 그 때 죽은 초 평 왕의 묘를 차 헤쳐 그 시체에 300번을 매질함으로써 그 부친과 형의 원한을 풀었다. 초나라에 승전한 뒤 회군한 후에도 초나라를 격파하고 이어 북쪽으로 제 나라까지 격파하여 오나라가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오나라의 이웃 월나라 또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월나라 왕 윤상이 죽고 구천이 왕위에 오르자 오나라는 월나라를 공격했지만, 구천이 이끄는 월나라 군에게 대패하고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오 왕 합려는 손가락에 화살을 맞았고 이로 인해 얼마 후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유언을 남겼다. ‘너는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꼭 이 아비의 원수를 갚아다오’. 그 후 부차는 장작개비를 깔고 잠을 잤다. 장작개비에 찔려 몸을 쑤실 때 마다 부차는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며 복수를 다짐했다. 부차의 복수가 두려웠던 구천이 오나라를 선제공격하였으나 이를 대비하고 있던 오나라 군에게 대패한 월 왕 구천은 회계 산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고 이를 추격하여 산을 완전히 에워싼 오나라 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한 구천은 부차에게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이 항복을 받아들이려 하자 오자서가 나서서 간했다. ‘지금 월나라를 우리 오나라에 주려는 하늘이 내린 기회입니다. 지금 구천을 죽여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큰 화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구천을 인질로 데리고 있다가 얼마 후 돌려보내었다. 그는 식사 때마다 쓸개를 맛보면서 오나라에 대한 복수만 노렸다. 오 왕 부차가 오자서의 만류를 뿌리치고 제나라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구천은 이를 지원하면서 서시라는 미인을 바쳐가며 아부했다. 또다시 오자서의 반대를 무릅쓰고 합려가 제나라를 공격하려하자 합려가 오자서에게 자살을 명했다. 그러자 오자서는 ‘반드시 내 무덤 위에 나무를 심어 그것으로 왕이 죽은 후에 그의 관이 되게 하라. 그리고 내 눈을 빼 내어 오나라 성 동쪽 문에 걸어놓아 월나라 군사들이 처 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 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방심한 부차는 복수만을 노려 온 부차에게 패하여 자살로 그 복수극의 종말을 맞았다.
 통치자가 아랫사람들과 국민들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나 계획도 실행에 옮길 수 없고 그 통치자는 무능력자의 낙인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아랫사람들의 진심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대하고 신망으로 대할 뿐, 책망 대신 윗사람 자신이 책임진다는 자세로 나가는 것이 올바른 태도임을 말해준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