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어지러운 치자가 있는 것이지 어지러운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스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다스리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명군은 사람을 얻기에 급하고 암군은 권세를 구하기에 급급하게 되어 있다. 현인을 빨리 얻으면 몸이 편안해져 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람을 얻는 일에 서두르지 않고 권세를 얻는 일에 급급하다면 몸이 피곤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며, 공은 버려지고 이름은 욕되기에 이를 것이다. 윗사람이 자기 본위로 사심을 품을 때 그 아래 있는 모든 관리들이 이에 편승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할 것이다. 저울로 달아보는 것은 평형을 위한 것인데 윗사람이 자기 편의로 기울어진 저울을 사용한다면 그 아래 모든 사람들 또한 이에 편승하여 이익을 취할 때에는 되도록 많이 받고 나누어 줄 때에는 되도록 깎아서 아무 근거 없이 자기 편의로 국민들로부터 편취하게 될 것이다. 근원이 맑을 때 흐름이 맑고 근원이 흐릴 때 흐름도 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위에서 법률 규정과 품위를 지키고 현자와 유능한 인물들을 중용하면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없을 때 아래에서도 역시 품위가 저절로 우러날 것이며 충성과 신용으로서 각자의 본분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어서 포상 제도를 쓰지 않더라도 국민 모두는 모두 각자의 생업을 위해 노력하고 형벌 제도가 없더라도 국민들은 준법에 길들여 질 것이며, 공직자들이 일일이 수고하지 않더라도 국민 화함을 기반으로 한 통치가 매끄럽게 흘러 갈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법규나 제도라 해도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에게 달린 것이지 그 자체가 훌륭할 수는 없다. 모든 인위적인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완성된 인간, 이것이 우리의 나아갈 길이다. 따라서 법이나 제도가 흐름(流 flow)일 때 사람이 그 근원이 된다. 사람의 됨됨이는 마음속에서 결정 된다. 올바른 사람이란 남에게 받지 않고 베풀며, 힘이 아닌 논리를 사용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닌 해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조 6대 성종 때의 신하 최승로는 고려 건국 이후 다섯 왕들의 장단점과 치적들을 약술했다. 이는 앞으로의 정치를 어떻게 펼쳐 나갈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세우는데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넓은 포용력을 보여주었고, 이복동생 요(정정)와 소(광종)가 역심을 품고 있다는 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에게 따뜻하게 대한 혜종의 우애, 왕 규 등의 역모에 맞서 왕식렴과 함께 이를 막아낸 정종의 사직을 위하는 마음, 즉위 후 아래 사람들을 예로서 대하고 항상 호족과 무사들을 억제하며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준 광종의 공평무사함, 즉위 초 참소와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문서를 모두 태워버리고 죄 없는 백성들을 석방하여 광종의 공포정치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했던 경종의 현명한 판단력 등을 모든 군주가 가져야 할 덕목임을 지적하여 성종에게 올린 것이다.

 먼저 최승로는 국토방위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특히 서북 지역의 국경을 확정하고 수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장했다. 다음으로 그는 불교에 대해 비판하고 승려들에 대한 지나친 우대를 줄이며 불교 재단을 엄격히 관리할 것 등은 건의했다. 또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유교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근본이고,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고 주장하여 불교의 필요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이어 그는 왕실과 군주의 도리에 대한 유의사항을 열거했다. 이에 따라 정종 때에 지나치게 늘어난 시위대와 궁중의 노비, 가마의 수를 줄이고 왕실의 번잡한 제사를 줄이고, 군주는 신하를 예우하며, 군주가 언제나 바른 몸가짐을 가질 것 등이 포함된다. 또 그는 외교와 경제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소한 적선행위를 금지하고 상벌을 공평하게 내리며, 외국에 보내는 사신의 수를 줄이고, 불상 제작과 경문 필사에 들어가는 인력과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승로는 또 지방 정책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안을 제시했으니, 주요 지역에 관리들을 파견하고 섬 주민들에 대해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할 것을 주장했다. 또 사회 문화 분야에 대한 문제로서 의복제도를 정비하여 신분 제도를 확립하고 양민과 천민에 관한 법령을 확립하여 엄격히 신분 제도를 유지하게 하고 고려 고유의 풍속을 지켜 민족정신을 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약하면 지나친 왕권의 강화 보다는 안정된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표방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성종을 크게 공감시켜 새로운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고려 초의 정치사상과 역사적 상황이 포함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나 그 후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자료들이 소실되어 완전히 전하지는 못한다.
 그는 이어 이 모든 제안에 대해 성종으로부터 인정받아 유교를 기초로 하는 국가의 기틀을 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성종의 개혁 정책에 앞장섰고, 고려를 살기 좋고 생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그는 이 몽유 등과 함께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강감찬 등을 발탁하는 등 인재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종의 정치적 경륜이 쌓여 가면서 정치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최승로는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계속된 개혁과 함께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했던 성종으로서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인재인 그의 사직을 허용할 수 없었다. 최승로는 문하수시중으로 임명되고 700호의 식읍을 받았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사임을 청하였으나 허락 받지 못하고 성종의 곁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성종의 뒤를 이은 목종, 덕종 등의 왕도 그를 기리면서 그가 세운 국가의 기틀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제안하더라도 군주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되는데, 최승로는 한 번도 왕으로부터 미움을 산 일이 없고, 그의 진언이 채택되지 않은 것이 없다. 더불어 훌륭한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훌륭한 인재를 옆에 두는 일이고, 또한 그를 믿어 줄 것이며,  그 훌륭한 진언을 채택하는 일인데 성종이 바로 그런 덕목을 갖춘 군주였던 것이다. 진(秦)나라 말기에 천하를 놓고 쟁패를 벌린 항우에게는 범 증을 포함한 수많은 유능 인재들이 있었지만 항우 자신의 능력만 믿고 아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 모든 것을 잃고 만 역사적 사례와 큰 대조를 이룬다.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경영하는 데는 혼자 힘으로는 될 수 없고 통치자 자신이 유능해야 할 뿐 아니라 유능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두는 것이 중요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무능하면서도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측근에 있는 기용한다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통치에 있어서 정의로움을 앞세우고 이익을 뒤로하며 시비곡직을 바르게 하며 만인을 위하고 먼 장래를 내다보는 통치 정신만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기본 정신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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