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은(殷) 나라의 주왕(紂王) 때 전국을 세 지역으로 분할해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들 세 지방의 방백 중 서쪽을 다스리던 서백(西伯) 희창(姬昌)은 선정을 베풀면서 국토를 넓혀가던 중 세상을 떠났고, 그의 둘째 아들인 발(發)이 포악한 주왕에게 반기를 들어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주(周) 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새 왕조를 창업한 주(周)의 무왕(武王 姬發)에게는 여러 명의 아우들이 있었는데 그 중 바로 아래 아우가 주공(周公) 단(姬旦)이다. 주공 단은 효심이 매우 두텁고 자애심도 매우 깊어서 아버지인 문왕(文王 姬昌)이 살아 있을 때부터 다른 형제들 보다 뛰어났다. 형 무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항상 왕의 분신으로 국정에 참여했다. 전 왕조인 은  나라를 무너뜨린 뒤 2년을 지났으나 아직 천하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무왕이 중병으로 쓰러지자 신하들 사이에 동요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자 주공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면서 형인 무왕의 쾌유를 기원했다. 무왕의 3대 조상인 태왕(太王), 왕계(王季), 문왕(文王)을 모시는 세 개의 제단이 세워졌다. 주공은 보옥을 몸에 지니고 제단 앞의 북쪽을 향하자 사관이 제문을 읽어 내려갔다. 3대의 선왕이시여 선왕의 뒤를 이으신 임금 발(姬發 武王)은 너무도 나라를 위해 애쓴 나머지 지금 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저 단(姬旦 周公)은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충분히 여러분들을 모실 수 있다고 여기오나 제주도 없을 뿐 아니라 이렇다 할 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 발은 사방에 길을 펴내야 할 상제(上帝)의 명을 받은 몸으로서 훌륭하게 주 왕실을 안정시키고 천하 만민의 존경을 모으고 있나이다. 이제 만약 선왕들께서 임금 발을 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저희 임금에게 내리신 천명을 해치시지 않고 지켜주신다면 종묘에 계신 거룩하신 영혼들이 영원토록 평안하신 터전을 이룩하게 되겠나이다. 저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이 보옥을 가지고 어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겠나이다. 만약 저희 뜻을 받아주지 않으신다면 이 보옥도 소용없는 것이라 여기고 영원히 버리겠나이다. 이 제사가 끝난 후 복관들이 점괘를 보니 모두 길(吉)한 것으로 나왔다. 그 날로 부타 무왕은 쾌유했다. 주공은 제문을 상자 속에 넣고 자물쇠를 잠근 뒤에 보관 책임자에게 잘 간수하도록 명령했다. 그 뒤에 무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 때 태자인 성왕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 무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주공은 우려했다. 그는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이 되어 국사를 맡았다. 그러자 관숙(管叔)을 비롯한 무왕의 다른 아우들은 주공에 어린 성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고 모함했다. 성왕 또한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성왕은 성인이 되고 주공은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세상을 떠났다. 주공에 떠난 그해 추수하기 전 갑자기 폭풍이 불어오고 벼락이 몹시 떨어지는 통에 벼와 조 수수 등 곡식이 모두 땅에 쓰러졌고 큰 나무도 밑동이 넘어지게 되자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 왕은 대책을 세우려고 예복을 입은 후 비밀문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지난 날 주공에 무왕을 위해 지은 제문이 들어 있었다. 자신을 제물로 바쳐 형인 무왕의 목숨을 구하고자 했던 간절한 그 기원이 들어 있는 제문이었던 것이다. 성왕은 제문을 손에 들고 울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은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전에 주공께서는 왕실을 위해서 그 같이 애쓰셨음에도 불구하고 과인은 어린 탓으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노라. 이제 하늘은 주공의 뜻을 나타내시느라고 이와 같은 위엄을 보여주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삼가 주공의 영혼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로써 덕망이 높았던 분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야겠다.’

 조준(趙浚)과 조견(趙犬) 두 형제는 고려 말고 조선 초기의 인물이다. 조준은 이성계를 도운 개국공신으로 영화를 누렸으니 정종 이후 8년간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고려조 공민왕 2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계에 입문했다. 이성계는 조준의 토지개혁에 대한 의지를 알고 그를 초청했다. 이 토지 개혁안으로 고려 말의 친 원 파가 힘을 잃고 친명파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던 날 밤 조준을 은밀히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대는 한나라 문제가 왕으로서 황제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오자 송창을 위 장군으로 삼아 남.북군을 진무한 예에 따라 그대에게 5도의 병마를 맡겨 총찰케 하노라.’ 그토록 조준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는 말이다. 조준은 성품이 원만하고 몹시 부드러웠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에 대한 우애 도한 매우 깊었다.
 조준의 아우 조견의 원래 이름은 조윤이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뒤에 견(犬)으로 바꾸었다. 형 조준이 역성혁명에 가담한 것을 눈치 챈 그는 형을 극구 만류했다. 형님, 우리 집은 조상 대대로 고려에서 벼슬한 집안입니다.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해야 합니다..‘ ’고려는 도저히 재기할 수 없다. 새 주인을 모시고 백성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해야 하느니라‘. ’명분이 없습니다. 형님, 고려를 무너뜨려야 할 명분이 무엇입니까 ?‘ ’이미 신우(우왕) 때부터 왕 씨는 무너졌다. 정통성을 잃은 고려이니라.‘ ’그것은 이성계 일파가 구며 낸 일 아닙니까 ?‘ ’그렇지 않다, 그는 신돈의 아들이니라‘. ’형님, 증명해 보십시오‘.조준은 할 말을 잃었다. 동생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안 조준은 조견을 영남 안찰사로 내려 보냈다. 그에게 동생은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견은 영남루에 올라 망국의 한을 시로서 달래었다.

삼년동안 두 번이나 영남루를 지나며
은은한 매화 향기는 나를 머물라 한 하는구나
술을 들어 근심을 씻고 노년을 보낼만하니 
평생에 이 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조견의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오기 전에 고려가 망했다. 그는 통곡하고 곧장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성계는 그의 재주를 아껴 호조전서에 임명하고 등청하라는 글을 보냈다. 이에 조견은 답장을 보냈다. ‘송산의 고사리 캐기를 원할 뿐이오.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후 조견은 거처를 지리산에서 청계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날마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송도를 바라보며 통곡했다.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가리켜 망경봉이라 했다. 이성계가 그 절개를 높이 사서 만나기를 청하자 조견이 하락했다. 이성계는 청계산 아래까지 말을 달려갔다. 조견은 이성계를 만나 읍만 하고 끝내 절은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신하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조견은 할 말을 모두 해버렸다. 그는 역성혁명을 일으킬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불경스러운 말을 듣고도 오히려 청계산의 일정한 지역을 그에게 봉하여 주고 그가 마음 편히 살도록 조치해 주었다. 또한 돌집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 모두 거절하고 양주 송산으로 옮겨 살았다. 그는 죽음에 임박하여 자식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 묘석에는 반드시 고려조의 벼슬을 쓰고 자손들은 새 조정에 벼슬하지 마라’. 조견이 세상을 떠난 후 새 조정에서 추증한 벼슬을 비석에 새겨 세웠다. 그러자 벼락이 떨어져 그 비석이 깨어져 버렸다. 조견은 조선의 개국공신 이름에 오르기도 했다. 형 조준이 동생을 살리려고 취한 조치임을 알면서도 혹 형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그대로 놔 둬 버렸다. 사실 조견이 이성계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도 무사했던 데는 형 조준의 형제애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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