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천하의 변괴(變怪)는 세 가지이니, 아내가 남편의 자리를 빼앗는 것과,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것과, 기(氣)가 이(理)의 위치를 빼앗는 것을 가리킨다. 모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의 혼란이 대개는 분수를 모르는 주제넘은 행동이나 사람으로서 하지 못할 도의에 어긋난 행동이 사회적 변괴로 이어진다는 경고일 것이다. 인간은 또 생명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발명한 것이 없으면서, 죽음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는 자연을 능가하여, 화학이나 기계의 힘으로 악역이나 유행병이나 기근에 못지않은 살육도 서슴없이 감행하고 있는 사례들을 얼마든지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늘 입으로는 선을 부르짖으면서도 그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추하고 악한 모습이 끊임없이 그 출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기회만 있으면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악의 소행은 뒤집어 볼 때, 그 인간의 장점이 단점으로 변하고 단점이 장점으로 변하기도 하는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점으로 보여주는 인간으로부터 그 장점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데서 스승이 될 수 있고 단점을 가진 인간으로 부터는 저런 단점을 갖지 말아야 하겠다는 반성에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수양제(隋煬帝)는 부 황(父 皇)인 수 문제(隨 文帝)를 독살하고 제위에 오른 후 수문제가 이루어 놓은 국력을 모두 토목공사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낙양에 현안 궁이라는 호화판 궁궐을 조성했다. 전국을 유람하여 놀이에 쓸 어좌선과 운하의 건설에 착수했다. 늦가을에 낙엽이 지면 색색의 비단 옷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한 다음, 달밤이면 수 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을 거느리고 말을 탄 채 그 곳을 노닐며 음악을 연주하며 즐겼다. 태원(太原)에서 거병한 이연(李淵)이 수양제의 이러한 사치와 폭정에 힘입어 쉽게 여러 지방을 점령해 들어가 장안까지 수중에 넣고 당(唐.)을 세웠다. 이연의 아들 이세민(李世民)은 전 왕조의 수양제가 했던 모든 실정(失政)이 반면교사가 되어 성공적인 정사를 펼 수 있었다.
 나라가 망하는 사례로 가장 확실하고도 뚜렷한 사례라면 외적의 침략 보다는 내부의 적, 자체의 국론통일과는 거리가 먼 자중지란이 그 첫 번째 원인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라면 막강하던 고구려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불화하여 힘없이 나라가 망한 사례이고,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또한 예외 없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떠나 버린 자중지란에서 어김없이 망국의 그림자가 찾아든 것이다.

 우리는 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도적 위만이 우리 단군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으로 기술한 엉터리 역사를 계속 가르치고 있다. 어느 나라든 성쇠를 피해 갈 수는 없으니 단군조선 또한 단군조선에서 북부여(北夫餘)로 계승된 다음 이어 삼국시대로 이어진 것이고, 위만이 일시 점령했던 변한지역인 지금의 중국 산해관과 갈석산 근처는 이 후 부여와 고구려에 의해 우리 땅으로 재 편입된 것이 우리의 바른 역사인 것이다. 단군조선에서 (북)부여로 이어지는 과정 또한 오랜 내홍(內訌)과 자중지란 끝에 일어난 일이다. 47세에 이르는 단군조선 왕조가 43세 물리 단군에 이르렀을 때 사냥꾼 우화충(于和冲)이 무리를 이끌고 도성을 공격하자 물리 단군이 피신 중 사망하고, 이어 백민성(白民城 )의 욕살 구물(丘物)이 반란군을 평정하고 44세 단군의 위에 오르면서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다. 단군조선 건국 당시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인 부여(夫餘)가 서쪽 땅을 제후국으로 받았던 것이 부여의 시원이며, 개국 초기의 역동적인 모습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 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던 단군조선(대부여)은 45세 여루 단군 때에 조선과 접한 연나라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46세 보을 단군 때에는 번한 왕이 연나라 자객에게 피살당하기도 하였고, 단군의 자리를 노린 찬탈 행위가 있었으니, 한 개(韓介)가 수유의 군사를 이끌고 궁에 난입하여 단군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러자 장군 고열가(高列加)가 내란을 진압하고 47세 단군의 위에 올랐다. 이어 장수들의 반란이 그치지 않게 되자 고 열가 단군은 오가의 신하들에게 다음 단군을 추천할 것을 부탁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니 기원 전 238년에 단군조선이 그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어 해모수가 고열가 단군의 뒤를 이으니 그가 곧 북부여의 창업주가 되었다..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인 한 무제가 다시 북부여 까지 쳐들어가자 장군 고두막한이 이를 대파하여 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북부여의 5세 단군의 위에 올랐다.

 우리의 단군조선이 부여로 넘어갈 무렵, 진시황이 죽고 그의 아들 호해가 2세 황제가 된지 7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평소에는 부역에서 제외되었던 가난한 사람까지 동원되어 멀리 북쪽의 어양으로 국경 경비를 위해 떠나게 되었다. 모두 900명이 어양으로 가던 도중 대택향이라는 곳에서 묵을 때 큰 비가 왔다. 그 무리 속에는 남의 집에 머슴을 살던 진승(陳勝)과 오광도 끼어 있었다. ‘도망쳐 봤자 머지않아 붙잡혀 죽는다. 반란을 일으켜 봤자 빤하다. 이왕에 죽을 바에야 온 나라가 뒤집힐 일을 저질러 보고 죽는 게 어떻겠느냐 ? ’ 그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오광이 이들 앞에 나서서 ‘나는 도망 칠 것이다’라고 여러 번 외쳐댄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러자 인솔자 중 장위(장교) 한 사람이 오광에게 매질을 가했다. 재빨리 그 장위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든 오광에게 그 장위의 목이 달아났다. 이어 진승의 손에서 또 다른 장위의 목이 떨어졌다. 반란군은 우선 대택향을 점령하여 무기와 병력을 차지하고 이어서 기현을 공격했고, 이어 여러 고을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진승은 점령지 유지들의 주청으로 장초(張楚)라는 국호로 왕위에 올랐다. 진승의 신하 중 무신, 장이, 진여 등은 북쪽으로 쳐 올라가 원래 조 나라의 영토였던 곳을 점령하였다. 조나라를 평정한 무신은 조 나라 수도 한단에 돌아오자 진왕(陳勝)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조왕이라 일컫고 진여를 대장군에, 장이와 소소를 좌우 승상에 임명했다. 진왕은 속이 뒤틀렸지만 이를 승인하고 이들에게 서 쪽 진나라를 칠 것을 명하였으나 무신은 이를 무시하고 북 쪽 연나라를 쳤다. 한 편 형양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오광은 부하들의 손에 목이 떨어졌다. 진왕은 신하들을 엄격하게 감시했다. 장수가 적진에서 적을 무찌른 후에도 진왕의 명령대로 평정하지 못한 자에게는 죄인의 굴레를 씌워 체포했다. 진왕과 장군들의 사이는 멀어져 가기만 했다. 진왕은 결국 실패했지만 이를 계기로 뒤 이어 항우와 유방이 일어나, 진(秦) 나라는 망하고 유방의 한(漢)나라로 넘어가게 되었다. 진왕(陳勝)과 신하들 간의 틈이 자중지란으로 이어지면서 흐지부지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역사란 다른 말로 사례연구 참고서라 할 수 있다. 그 역사 속의 크고 작은 무수한 사례들을 통해 흥망의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계의 역사는 흥망의 역사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제 현상 또한 이 역사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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