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인생은 만남에서 시작되고 진행되고 또 끝나기도 하는 존재다. 이 만남이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운명이 되기도 한다. 부모와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등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좋게 든 나쁘게 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게 되어 있다. 인생살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이 만남과 헤어짐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그 만남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두터운 우정의 만남, 진리와 지혜를 주고받는 인격적 존경을 싹틔우는 스승과 제자와의 만남, 이러한 깊은 만남에서는 타산적 이해관계의 일시적 만남에서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인생의 참 맛이 샘솟을 것이다. 거기다 새로운 만남을 통해 꽉 막혀있던 자신만의 세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창의성으로 까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로 이끌어 준다면 더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나의 만남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서로에게 축복이 되어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1941년 무렵, 이 철이 이끄는 조선 악극단이 평양 금천대좌(金天代座)에서 공연을 할 때였다. 남인수가 ‘인생출발(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을 부르자 사람들이 앙코르를 부르는 등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들썩거렸다. 같은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렀다. 노래 중 ’무릎을 꿇고 앉아 죄를 빌었소. 운명의 쇠사슬을 어찌합니까,‘ 등 우리민족의 아픔이 절절이 배인 대목에서 흐느끼는 사람조차 있었다.

 장명등 무르녹은 층층다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죄를 빌었소
 울면서 보낸 사람 만날 길 없는 운명의 쇠사슬을 어이합니까 

 장명등 그림자에 밤을 새우며 못생긴 내 청춘을 뉘우쳤건만
 참다운 사랑 속에 싹트는 행복을 짓밟은 내 양심을 전하오리까

 장명등 가문 불에 떠들거리고 내일의 새 희망을 다시 찾았소
 꽃다운 인생길에 노래 부르며 그대여 눈물 없는 길을 갑시다.

 공연이 끝나자 형사 한 사람이 나타나 공연 책임자와 문제의 노래 ‘인생 출발’에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갔다.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는데 보니 그 상황을 신고한 사람이 조선인 형사였다. 가장 문제가 된 대목은 ‘운명의 쇠사슬을 어이 합니까 ’였다. ‘일본이 조선을 묶었다’라고 표현한 것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려는 조사가 벌어진 것이다. 다음 공연 준비도 해야 하고 잠도 자야 하는데 밤을 새워 조사를 한 것이다. 그나마도 발이 넓었던 악단 장 이 철이 손을 써서 다음 공연 직전에야 일방적인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자고 시달린 남인수가 곧바로 악극 ‘;춘향전’에서 이도령 역할에 나섰다가 피를 토하고 무대에 쓰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결핵을 앓고 있던 남인수가 토막잠마저 자지 못하고 이틀 밤을 새웠으니 극도로 몸이 상한 탓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흔히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을 당할 때 운명이나 팔자소관의 탓으로 돌리면서 체념에 빠지거나, 때로는 실제로 겪어야 하는 괴로움 이상으로 더 증폭된 아픔으로 맞아들이기 까지 한다. 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이 맞아야 할 손님이라면 준비 없이 허둥대기 보다는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대처할 수 있는 사전 준비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된다.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는 안회라고 하는 가장 신뢰 받는 제자가 있다. 안회는 집이 가난하고 불우했으나 그것을 조금도 고통으로 알지 않았고 생애를 통해 화를 내거나 불평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안회는 조그마한 대바구니에 담은 식사와 호리병박에 가득 채운 물병 하나 만으로 좁은 골목 안에 살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런 생활에는 견딜 수 없을 터이지만  그는 그런 역경 속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인생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가난이 그의 정신세계와는 일체를 이룸으로써 그 가난이 그를 손상하기는커녕 인생의 즐거움으로 승화된 것이다. 그가 가난을 원망하고 가난과 다투었다면 마찰과 저항이 일어나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병이 들면 그 병과 일체가 될 일이다. 미리 앞당겨서 불안감이나 고통을 자초한다면 이보다 어리석을 일이 없으니 이를 미리 제거해 버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는 달리 모든 일이 순조롭게 원하는 대로 흐를 때에도 이 흐름과 일체를 이룰 때, 이 순조로움을 잃을까 하는 쓸데없는 우려도 사라지고. 이를 더 가지고 싶은 욕망도 사라지게 되면서 오직 즐거움만 남게 되는 것, 이것이 안회가 즐거울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축축한 습지에 사는 식물은 햇살이 따갑게 비치는 메마를 태양에서 잘 살기 어렵다. 이와 달리 건조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선인장을 습지에 심는다면 이내 죽고 말 것이다. 사람에게도 자신의 성향과 기질이 잘 발휘되는 장소와 일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장소를 찾아내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에서 예를 든 공자의 제자 안회와 같은 고도의 수련이 어렵다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운명의 추종자가 아닌 운명의 주인이자 개척자라는 말이다. 운명에 기대를 건다거나 운명을 탓한다면 이는 바로 자신감이 없다는 말 밖에 안 된다. 자신의 운명을 탓하거나 불평하기 전에 자신을 괴롭히는 고난과 화해할 필요가 있다. 열린 마음으로 그 고난에 다가가 그 고난과 친구가 되어 가감  없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항상 안락을 추구하며 고생을 싫어하고 게으른 것을 좋아하는 천성을 타고난다. 힘이 강할 때 남을 이길 수 있지만 진정으로 강한 자는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인간 자신이 얻고자 하는 일에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희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다는 것, 이것이 진짜 장애라는 말이다. 운명처럼 보이면서 눈앞에 닥쳐와 있는 난관, 이는 늘 반갑게 맞이하고 길들여 벗하며 살아가야 할 손님이자 친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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