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혼란을 거듭하던 중국에 수나라가 통합 왕조를 세우고 수 문제와 양제 2대에 걸쳐 우리의 고구려로 여러 차례에 걸쳐 수백만 대군을 몰고 침공해 왔으나, 그 때 마다 강이식 장군과 을지문덕 장군의 멋진 작전에 걸려 침략군이 거의 전멸 당하는 패배를 거듭한 끝에 급기야는 나라마저 당나라에게 넘겨주면서 단명 왕조로 끝나고 말았다. 이어 등장한 당 나라의 2세 황제 이세민 역시 고구려 정벌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서기 645년 고구려 정벌을 위한 총 동원령을 내렸다. 당의 총수 이 세적을 중심으로 열 개의 부대가 안시성을 에워싸고 총 공격을 개시하였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楊萬春)은 성을 철통같이 수비하고 평양에서 원군이 올 때 까지 당 나라 군을 안시성에 묶어 두려는 전략에 돌입했다. 양만춘의 조카인 양 봉수는 그의 두어난 활솜씨를 부하들에게도 훈련시켜 사정거리 2천보에 잇는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명사수들로 훈련시켜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며칠 후 연개소문이 보낸 1만 4천의 병력은 당 군의 배후를 습격하고 보급품을 차단하는 등 후방 교란 작전으로 전투를 도왔다.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진두에 나와 안시성 공격에 총력전을 폈다. 아무리 매서운 총 공격을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자 다른 전략을 쓰기로 했다. 고구려에서는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말갈 군 15만영을 이끌고 안시성으로 와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보루를 만들어 주둔하면서 당 나라 설인귀가 이끄는 야전군과 대치했다. 고구려 군은 당 군을 이리 저리 끌고 다녀서 지치게 만든 다음 역습을 가하니 당의 야전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 군은 이제 성 옆에 높은 돈대(墩臺)를 쌓고 성 안을 정찰하려 하였으나 낮에 애써 쌓아놓은 돈대가 밤이면 고구려 군의 습격으로 허물어졌다. 당 태종은 성 앞에 성 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아 거기서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려 했다. 이 공사에는 매일 50만 명이 동원되어 60여일에 걸쳐 높이 100미터, 넓이 300미터, 길이가 9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토산을 완성한 것이다. 산이 완성되자 당 태종은 큰 잔치를 열었고, 당 군은 오래간만에 푸짐하게 배를 채우며 자축했다. 바로 그 날 밤 양 수봉이 이끄는 별동대가 안시성의 성벽을 타고 내려와 토산으로 접근한 다음 토산 수비병들을 독화살로 죽여 버리고, 바깥 부분을 흙   주머니로 덮고 속에는 통나무를 엮어 쌓아 올린 토산 파괴 작전에 들어갔다. 그 나무 기둥에 골고루 기름을 뿌리고 거기에 유황 염초를 묶어 단 후 불을 붙인 것이다. 한 밤중에 토산이 불덩이에 싸여 무너져 내렸다. 허둥대는 당 군 진영으로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화살이 비 오듯 날아들어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 까지 생겨났다. 당 태종과 이 세적 사령관이 있는 본진에는 난데없는 기병들이 질풍같이 달려오며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화살은 단 한 대의 허실도 없이 적군의 심장, 목, 턱에 명중했다. 당 태종은 가슴에 두 대의 화살을 맞고 허둥대는 사이 화살 하나가 날아와 오른 쪽 눈을 뚫어 버렸다. 그 동안 안시성에는 눈이 날리는 겨울이 왔다. 겨울 준비가 없었던 당 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성은 여전히 건재하여 침략군을 조롱하고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당 군의 비참한 퇴각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추격군은 퇴각하는 당 군을 뒤에서부터 도마뱀 꼬리 자르듯 잘라 나갔다. 당 군은 끝없이 펼쳐진 늪지대를 허우적거리다가 추격군의 기습을 받아 무수히 쓰러져 갔다. 그 후에도 당 태종은 두 차례나 더 고구려로 침공해 왔으나 승전으로 사기가 높은 고구려 군을 지휘하던 연개소문의 분전으로 번번이 패퇴해 돌아갔다.

 연개소문도 처음에는 당과 평화롭게 지내고자 당 나라의 국교인 도교를 받아들이고 유화 정책을 폈으나 당은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까지 침략하려 들자 강경 노선으로 전환했다. 연개소문이 와병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당의 고종은 즉각 동원령을 내려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에 연개소문의 장남 연 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막리지에 올라 당 나라와 고구려 간 9차 대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정명진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 군을 귀단수에서 격멸하고 멋진 승리를 거두었다. 연개소문이 죽자 24세의 연 남생은 대막리지가 되어 병권을 포함한 큰 권력을 쥐게 되었다. 서기 658년 6월 연개소문의 사망 소식에 고무된 당 군이 다시 설인귀와 정명진을 앞세워 앞서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요서의 땅을 되찾고 동진해 왔다. 이 10차 침입에서도 연 남생의 뛰어난 용병에 힘입어 고구려가 승리함으로써 연 남생은 입지가 굳어졌다. 당 군은 설필하력을 총수로 하여 북쪽에서 공격해 오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백제를 멸한 소정방이 남 쪽에서 평양성으로 진격하자 전선이 분산된 고구려가 고전하게 되었으나 일단 방어에는 성공했다. 고구려는 매년 벌어지는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으로 흐르고 있었고 당 나라 또한 길고 긴 소모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어 661년 4월, 당은 35만   명이라는 추가 병력을 더 동원하여 소정방의 평양성 공격을 도왔다. 이 대규모 전투에서 고구려 군은 흔들림 없이 잘 버티어 내었고, 당 군에 널리 퍼져있던 ‘고구려 원정길은 죽어 귀신이 되어야 돌아간다’ 는 공포심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661년 8월 남생이 북쪽에서 쳐들어 온 설필하력을 크게 격파했으나 평양성 전투를 고려하여 추격하지는 않았다. 서기 662년 방효태를 앞세운 당 군이 다시 침공해 오자 고구려 군은 적을 유인하여 거의 전부를 수장시키고 적장 방효태 마저 물귀신이 되었다. 그 동안 남생은 주력군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내려 가 성의 포위군을 역 포위해 버렸다. 당 군은 식량난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다급한 소정방이 나당 동맹을 내세워 신라에 구원을 청하자 김인문 등을 보내어 식량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고구려 군이 급습하여 탈취해 가버렸다. 굶주림에 궤멸된 당 군은 겨우 수천 명만 목숨을 건져 퇴각했다. 무려 12 차례의 전쟁으로 200만이 넘는 생명을 고구려 땅에 바친 것이다.
 권력을 손에 쥔 연 남생은 소수의 근위병만 데리고 변방 순찰에 나섰다. 언제 내침할지 모르는 당 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연 남생의 아우 연 남건이 권력에서 밀려난 구세력들을 부추겼다. 남건이 이들을 모아 남생이 있는 국내성으로 쳐들어가자 고구려는 내전에 휘말려 들었다. 남생은 세 불리를 느끼고 안시성으로 도망쳤다. 궁지에 몰린 그는 앞 뒤 분간을 못한 채 당 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의 신하로 자처한 남생이 당 군의 힘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고 구구려 멸망의 선봉에 섰다. 이것으로 고구려 900년(북부여 해모수부터 보장왕 때 까지) 역사도 뒤안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국민이 애국심으로 뭉쳤을 때 어떠한 적도 물리칠 수 있지만 자중지란으로 국론이 분열될 때 그 결말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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