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지금은 전 세계를 누비는 한류의 열풍 속에 대중가요가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하기 까지는 사실상 그 태동기를 우리 겨레에게 지워지기 어려운 암흑시대인 일정시대로 잡을 수 있다. 순수한 우리 가락인 국악에서 외래 문물을 가미한 대중가요가 태동하여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가 1920년대이고 이어 1930년대에 이르러 설움에 받친 겨레의 애환을 진솔하고 가감 없이 담아낸 신 민요에 이어 두 박자의 트로트가 주류를 이룬 대중가요가 확고히 뿌리를 내려가던 시절이었다. 헐벗고 굶주리는 고달픔에 못 이겨 만주, 중국, 일본 등지로 강제노역 또는 일자리를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설움을 노래한 ‘나그네 설움’, ‘타향살이’ 등이 큰 히트를 치면서 민족 가요로 자리 잡아 갔다는 것만으로도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당시에는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연예인에 해당하는 악극단 등이 만주, 일본, 한반도 등을 누비고 다니면서 공연을 하다가 형편이 어려워지면 공연단이 숙박료, 식대 등을 낼 수가 없어 여칠 씩 이고 인질로 잡혀 있기도 했다. 공연단은 노래, 춤, 만담 등의 재주 한 가지로는 흥행이 될 수 없어 여러 가지 기예를 익혀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러는 가운데 1930년대 하반기에 접어들자 배우들의 비참하고 서글픈 처지를 하소연하는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년설의 ‘유랑극단’, 남인수의 ‘방랑극단’, 박향림의 ‘청춘극장, 쓸쓸한 여관방, 막간 아가씨’ 등이 그것이다.

 한 많은 음악 소리 우리들은 흐른다.
 쓸쓸한 가설극장 울고 새는 화톳불
 낯 설은 타국 땅에 뻐꾹새도 울기 전
 가리라 지향 없이 가리라 가리라

 밤 깊은 무대 위에 분을 씻는 아가씨
 제 팔자 남을 주고 남의 팔자 배우나
 오늘은 카추샤요 내일 밤은 춘향이
 가리라 정처 없이 가리라 가리라

 흐르는 거리마다 아가씨도 많건만
 이 가슴 넘는 정을 바칠 곳이 없구나.
 차디찬 타국 달을 마차 위에 싣고서
 가리라 향방 없이 가리라 가리라

 박영호 작사, 전기현 작곡, 백년설 노래 ‘유랑극단’


 오늘은 이 마을에 천막을 치고 내일은 저 마을에 포장을 치는
 시들은 갈대처럼 떠다니는 신세여 바람찬 무대 위에 울며 새우네

 사랑에 우는 것도 청춘이려나 분홍빛 라이트에 빛나는 눈물
 서글픈 세리푸(연극 대사)에 탄식하는 이내몸 마음은 고향바다 헤매입니다

 불 꺼진 가설극장 포장 옆에서 타향을 해매이는 쓸쓸한 마음
 북 소리 울리면서 흘러가는 몸이여 슬프다 유랑극단 외로운 신세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방랑극단’


 울어라 깡깡이야 까강까강 울어라
 뚫어진 포장 사이러 타향의 달만 청승맞다
 손뼉을 쳐라 손뼉을 쳐 목소리마다 넋두리다
 오늘은 청춘좌 내일은 신무대 막간 아가씨

 울어라 손풍금이 품바품바 울어라
 오색 빛 라이트 속에 몸부림치는 꾀꼬리다
 손뼉을 쳐라 손뼉을 쳐 목소리마다 하소연 한다
 오늘은 인천항 내일은 원산항 막간 아가씨.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박향림 노래 ‘막간 아가씨’

 이 막간 아가씨란 연극이나 그 밖에 다른 공연을 할 때 막간에 나와 노래도 부르고 공연 종목과 출연자들을 소개해 주는 아가씨를 말한다. 노래의 가사가 말해 주듯 이 시기에 예술이란 한갓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의 하나에 불과함을 말해 준다. 더구나 막간 아가씨는 배우 중에서도 하급 배우로 대접 받았으니 그야말로 목소리마다 넋두리요 멜로디마다 하소연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음반 취입곡이 가수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하였는데 박향림은 이 노래를 태평 레코드에 취입하기에 앞서 오케이 레코드 회사로 찾아가 가수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회사 측에서는 서봉희, 이난영, 박달자, 장세정, 이은파 등의 여가수들이 있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래도 박향림은 끈질기게 달라붙으면서 전속가수가 못 될지라도 노래만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가창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그마저도 안 된다고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박향림은 오케이 레코드 회사에 대한 반발로 태평 레코드 회사를 찾아 가 전속가수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당시 태평 레코드사에서는 여가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시험 삼아 ‘청춘극장’의 악보를 주면서 사흘 후에 노래를 들어보고 괜찮으면 받겠다고 하였다. 박향림은 사흘 동안 시창을 거듭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노래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평가하는 오케이 레코드 회사의 콧대를 꺾어놓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사흘 후 태평 레코드 회사는 박향림의 노래를 듣고 전속가수로 받아들였고 박향림의 첫 취입곡인 ‘청춘극장’이 음반에 실려 세상에 나오자마자 기록적인 판매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겨레는 나라 잃은 설움으로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 눈물은 비관이나 좌절, 체념에서만 오는 눈물은 아니었다. 순결하고 근면한 겨레의 마음속에 흐르던 애국애족의 뜨거움의 열정이 그 출구를 찾고 있었으니,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드디어 슬픔에서 깨어나 눈물을 웃음과 힘과 낭만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맥맥히 분출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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