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인간의 가치관, 그리고 그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는 사고(思考)라는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다. 바로 이 사고가 행동을 바꾸고 행동은 습관을 바꾸고 습관은 성격을 바꾸고, 나아가 그 행동이나 습관을 동력으로 그 행동의 결과와 자신을 포함한 그 집단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그냥 사고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옮겨 가기 까지 에는 용기 있는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
 신라 17대 내물왕 37년(390년) 왜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알현하고 이렇게 아뢰었다. ‘저희 임금께서 대왕의 신성하심을 듣고 있습니다. 양국이 서로 친하기를 원하오니, 원컨대 왕자 하나를 저희 임금께 보내 주시 옵 소서’ 그러자 내심 왕은 어린 왕자를 외국에 보내기가 내키지 않았지만 외교의 한 방편으로 왕의 셋째 아들인 미해(美海)를 왜국으로 보내었다. 그 후 내물왕의 아들 눌지(19대)왕이 즉위 3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 알현하고 아뢰었다. ‘저희 임금께서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의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원해 소신을 보내 간청합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로 인해 화친할 길이 열림을 매우 다행히 여겼다. 곧 아우 보해에게 명해 고구려로 떠나게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왕이 여러 신하 및 나라 안의 호걸 협객들을 모아 친히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지난 날 나의 아버님께서 성심껏 백성들을 보살피느라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왜국으로 보내었지만 다시는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또 짐이 즉위한 이래로 이웃 나라의 군사가 매우 강성해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고구려가 유독 화친을 맺고자 했기에 짐이 그 말을 믿고 친아우를 고구려에 보내었었소. 그런데 고구려 역시 억류하고 보내지 않으니 짐이 부귀를 누리면서도 이 아우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고, 울지 않은 적이 없소. 만약 이 두 아우를 만나볼 수 있다면 선왕의 사당에 함께 감사드리겠소. 또 온 나라 백성들에게도 은혜를 갚으리다. 누가 이 일을 이룰 수 있겠소 ?’ 이에 여러 신하들이 상의한 끝에 삽라군 태수 박제상(朴堤上)을 추천하였다. 왕이 곧 박제상을 불러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그 일로 인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만일 일이 쉬운가 어려운가를 따진 뒤에 행한다면 이는 불충이고, 죽을지 살지 헤아린 뒤에 행한다면 이는 무용(無勇)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지만 명을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박제상은 옷을 바꿔 입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가 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갔다. 함께 달아날 약속을 하고 5월 보름날 먼저 고성(高城) 수구(水口)에 와서 기다렸다. 약속한 날이 되자 보해는 병을 핑계대고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다가 밤중에 탈출해 고성 바닷가에 이르렀다. 장수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보내 이를 쫓아 고성에 이르러 보해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항상 좌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그 군사들이 딱하게 여겨 모두 화살촉을 빼고 쏘았다. 이렇게 보해는 죽음을 면하고 신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왕이 보해를 보고나자 미해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박제상은 왕에게 절 한 다음 다시 왜국으로 갔다.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율포 바닷가를 거쳐 왜국 왕에게 아뢰었다. ‘나는 아무런 죄도 없는데 계림왕이 나의 부형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적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다. 박제상에 앞서 백제인 중에 왜에 들어간 자가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왕의 나라를 도모하려 한다고 참소했으므로, 왜가 드디어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회 정찰케 했다.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순라군(巡邏軍)을 포로로 삼고는 죽였으므로, 왜왕은 이에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겼다. 또한 신라왕이 미해와 박제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박제상을 정말 모반한 자로 여겼다. 이에 왜왕은 군사를 보내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하면서 박제상과 미해를 장수로 임명해 향도(嚮導)로 삼아 바다 가운데 산도(山島)에 이르렀다. 왜의 여러 장수가 몰래 의논하기를, 신라를 멸한 뒤에 박제상과 미해의 처자를 잡아 데려오자 했다. 박 제상이 이를 알고 미해와 함께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하자, 왜인이 이를 보고 딴 마음이 없다고 여겨 기뻐했다. 이 틈을 타 미해를 빼 돌려 신라로 탈출시킨 박제상은 왜인들에게 잡혔다. ‘네 어찌 네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 ?’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내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이리하여 그는 발바닥을 벗기우고 갈대를 베어 낸 위를 걷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계림의 신하임을 소리 높이 외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진(秦)에 이어 한(漢)으로 넘어 간 중국이 잠깐 왕망의 신(新) 나라로 바뀌었다가 광무제 유수에 의해 전한에 이는 후한을 세운 후 제 2세 효명제(孝明帝)때에 이르러 서역을 매우 중시하게 되었다. 당시의 역사서 후한서(後漢書)를 써서 남긴 반표(班彪)의 아들로 반초(班超)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말했다. ‘사내로 태어나 손에 쥘 것은 붓이 아니라 검이다‘라고 외쳐 온 그에게 서역 선선왕(鄯鮮王)을 설득하라는 명을 받고 36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강국인 후한의 사절이기에 선선왕은 사절을 정중하게 맞이하였고 식사 때마다 열 가지가 넘는 요리가 차려지고 왕의 중신은 다섯 명의 부하를 데리고 하루에 두 번씩 문안을 오기도 했다. 그러던 며칠 후 요리의 가짓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숙이는 각도도 달라졌다. 이미 수상한 낌새를 챈 반초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 흉노의 사절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 ‘ 깜짝 놀란 통역은 흉노의 사절이 온 것이 탄로 난 것으로 생각하고 사정을 털어놓았다. 흉노의 사절 200명은 성북(城北)에 막사를 치고 있었다. 서선왕의 선택이 흉노 쪽으로 기울고 있었으니 후한의 사절에 대한 대접이 소홀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초는 결단을 내렸다. ’오늘 밤 흉노의 사절단을 습격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가 없다. 흉노의 사절단은 후한의 사절단이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반초는 판단했다. ‘흉노는 우리가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급습을 해도 이쪽의 숫자조차 파악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서른여섯이지만 5백, 아니 5천명으로 보이도록 하자’. 부하들 가운데 열 명의 정예를 선발해 공격하게 하고 북과 징을 크게 울려 대면서 몸이 날렵한 세 명이 막사 곳곳을 방화했다. 흉노의 막사는 주로 짐승의 털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단단하게 하기 위해 표면에 짐승의 기름을 발라 불타기 좋게 되어 있었다. 열 명의 정예 요원들이 맹수처럼 고함을 쳤다. 기습에 놀라 당황한 흉노 사절단은 징 소리가 안 나는 쪽으로 도망치다가 그 곳에 기다리고 있던 궁수들의 세례를 받았다. 호랑이 굴로 들어간 후한의 사절단이 200명의 흉노 사절단을 전멸시킨 것이다. 반초는 피가 뚝뚝 덜어지는 두 개의 목을 들고 선선왕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자칫 내 목숨까지 위험하게 되겠구나’ 잔뜩 겁을 먹은 선선왕은 반초와의 협상에 응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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