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누가 봐도 오늘의 세태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고 싶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골동품상이나 박물관에서도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는 벌써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지 오래 된 것을 찾느냐 ?’는 힐문이 금방 입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것으로 충. 효 말고  또 있다. 하루 빨리 남북통일을 이루어 내는 일과, 이를 바탕으로 원천적으로 조상의 땅이었던 만주를 비롯한 고조선의 고토(古土)를 회복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국론통일 아니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나와 생각이 같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타도의 대상이 되어 우리끼리 싸움에서의 승자는 늘 외적을 무찌르고 돌아 온 것 보다 더한 개선장군이 되고, 패배자는 승자의 그늘에서 속앓이 해가며 또 그 승자를 해치워버릴 궁리로만 가득한 세상, 이런 암울하고 험악한 악순환으로 이어가는 분위기 속에서는 우리가 목표를 향해 매진하기는커녕 옆걸음 또는 뒷걸음질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 국론통일이라는 제 일의 목표는 우리 모두가 혼자서는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상호 의존사슬에 확고히 얽혀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그 시작이고, 그렇지 못할 때 영원한 옆걸음 또는 뒷걸음질 하다가 시궁창에 빠져 드는 것이 고작인 암담한 종말이 너무 눈에 선한 일로 다가오고 있다는 우려에서 하는 말이다.
 
 지금이라 해서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조선시대의 마을은 공동체로 형성된 씨족 마을이었다. 씨족 마을들은 국가 조직과 사회 조직의 기초가 되었다. 사회의 공동체 의식은 가족 공동체와 씨족에 대한 의식이 그 기초가 된다. 가족 공동체 안에서의 서열은 씨족 안에서의 연장자로 연장되고 나아가 국가 안에서의 씨족간의 연장자로 연장되었다. 따라서 가족 공동체가 잘 유지되려면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가 튼튼해야 했다 더욱이 그 시대에는 부부관계가 매우 중요시 되었다. 부인들의 행실이 늘 바르고 신의가 있었으며, 정조관념이 확고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면 중벌을 받았다. 또한 동성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씨족 질서가 유지되고 혼인을 통한 다른 씨족과의 유대를 강화했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국가에 대한 충성은 대단했다. 우리는 충효를 유교의 가르침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겨레는 유교를 수입하기 훨씬 전부터 충효를 도덕과 윤리의 가장 큰 덕목으로 알고 있었다. 충효가 으뜸가는 덕목으로 공존하게 된 것은 가족 공동체 의식이 국가 의식으로 확대되어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씨족 마을을 이루고 있어도 법을 어기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할 수가 없었고 또 해서도 안 되었던 것이다. 가족 공동체 의식과 씨족 공동체 의식은 죽은 후에까지 연장되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종교 관념과 결합되어 사망 후의 거처인 무덤을 가능하면 잘 꾸미려고 노력했다. 한 마을에 거주하던 씨족이 죽어서도 같은 곳으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사회적 지위와 경제 여건이 허락되는 지배 신분은 돌 묻이 무덤, 돌 상자 무덤, 돌 널 무덤, 고인돌 무덤 등 규모가 큰 무덤을 만들었다. 신분이 낮은 서민들은 움 무덤 속에 들어갔다.
 
 중국(춘추전국시대)에서 수입한 외래종교가 아닌 토착의 가르침이 충효라는 데서 그 기본사상이 어디서 오는지 좀 더 살펴본다면, 그들의 정신세계를 말해주는 종교를 빼 놓을 수 없다. 우리의 신선사상을 말해주는 선교(仙敎)는 다른 무엇보다 사람이 사회와 역사의 주체임을 밝히고 있다. 환웅이 태백산 마루에 내려온 목적은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신, 자연, 제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한 인본주의가 그 기본임을 천명하고 있다. 또 그 시대에는 현세에 지상낙원을 꾸미는 것이 목표이기도 했다. 환웅은 지상에 내려와 곡식, 질병, 인명, 질병,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맡아 다스렸다. 세상을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사회로 발전시키려는 재세이화(在世理化)가 국시가 된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이 불합리하다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세상을 합리적인 사회가 되도록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면서 지상 낙원 건설을 꿈꾸었던 것이다. 환웅이 지상에 내려온 이유는 늘 하늘에 듯을 두고 인간 세상을 열심히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 한님(桓因)이 이를 보고 그를 보내어 그 곳을 합리적인 세상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은 사람과 함께 살기위해 세상에 내려왔으므로 단군 조선인들은 신과 사람이 공존, 공영하는 사회를 추구해 나간 것이다. 이 인본주의에 대한 구체성 있는 실천이 조세 제도인데 농민들의 수확량에 대해 1/20이라는 당시로서는 아주 낮은 세율로도 나라의 경영이 원할 할 수 있었던 것은 규모가 큰 궁궐이나 종묘를 짓지 않고 거대한 무덤을 만들지 않았으며, 낭비나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검소하고 알뜰한 생활을 지도자가 솔선해서 선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나라는 역사적 문화재가 대단히 빈약한 편이고, 부분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제대로 보존할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값비싼 문화재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인본주의의 실천의지인즉, 이 일이 자랑거리일 수는 있어도 부끄러울 일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출현에 있어서도 최고신인 한님이 직접 사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지상에 내려와 곰으로 하여금 사람으로 진화하게 하여 여자가 되게 한 후 그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은 것으로 된다. 사람의 출현에 대해 신에 의한 창조설과 진화론을 잘 조화시켜 놓은 것이다. 또한 사물의 구성요소와 발전의 과정을 셋으로 보았다. 하늘을 대표하는 환웅과 지상을 대표하는 곰, 그리고 단군왕검이다. 하늘, 땅, 사람을 주요소로 삼은 것이다. 단군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도 한님, 환웅, 단군이라는 세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환웅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 증표인 천부인도 세 개였다.
 조상이 물려준 것이라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들이 무얼 했는지 알아보자. 양반이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집 안의 뜰이나 자기 밭에 난 잡초를 보고도 한 포기도 자신이 뽑으면 안 되고 꼭 사람을 불러서 뽑아야 했다. 또한 농업, 상업, 공업 등의 천한 일을 하면 절대 안 되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을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만든 주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반이 손으로 돈을 만지거나 세면 안 되었다. 또 하루 세끼 먹는 쌀값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공자왈 맹자왈 만 외워 두었다가 감투싸움이나 당파싸움 때 무기로 사용하거나, 잘난 조상들의 이름과 직위나 외우는, 위선의 표본이 양반이었다. 이 양반보다 더 훌륭한 반면교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이 국론분열, 나 혼자만 양반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상놈이 되어 나를 위한 시중이나 들게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고 있지나 않은지 통렬히 자문해 보고 싶어진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