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의학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함과 동시에 있었던 학문이고 그 쌓인 학문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고 보존, 발전시켜 온 것이기에 원시시대의 의학과 오늘의 첨단 의학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근대에 이르러 살아있는 한국인 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이라는 인간의 탈을 쓰고는 있을 수 없는 일본인의 짐승보다 못한 잔인한 행동도 의학발전에 대한 열망이라는 일면도 있지만, 꼭 그래야 한다면 저 자신의 살아 있는 몸으로 해야지 어째서 남의 몸에다 그런 짓을 해야 했는지 물을 때 무슨 답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건강에 대한 인간의 열정에서 생체실험까지 해 가면서 이룬 의학 발전이 오늘의 큰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학문에 비한다면 아직도, 또는 어쩌면 까마득히 제자리걸음이나 달팽이 걸음 수준에 맴돌고 있다 해도 뚜렷한 반론을 내놓지 못할 것 같고, 또 어쩌면 건강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기대 수준이 너무 높아 이를 못 따라 가는 데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책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신체에 이상이 생겼을 때 의약 또는 의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느님(조물주)이 만든 인간의 몸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자체 치유능력(viability)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장해물을 제거하거나 도와주는 일이 고작이다. 의학이나 의사의 입장에서는 너무 서운한 얘기일 수밖에 없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인체의 자생력을 대신해 줄 의학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아이를 낳을 때 도움을 주는 산파만 해도 진통하는 산모에게 특별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곤 없고 옆에서 보살피고 도와주는 일이 고작이다. 그래서 '옆(근처ob=near)‘과 '서다(stet=stand)'를 합성한 조산원 또는 산파술(obstetrics)이 그 역할의 한계점을 말해주는 것 같다.

 정치가를 꿈꾸던 청년이 그의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이런 대화가 오가게 된다.
‘ 허위는 무엇에 속하는가 ? ’.
‘ 불의에 속합니다’.
‘ 도둑질, 거짓말, 노역은 무엇에 속하는가 ?‘.
‘ 불의에 속합니다’.
‘ 만약 장군이 자국을 침략한 적을 벌하기 위해 노역을 시킨다면, 이것은 불의인가 ?’ .
‘ 아닙니다’.
‘ 만약 전쟁 중에 적을 기만하고 적의 재물을 훔친다면 이것은 무엇에 속하겠는가 ?’.
‘ 물론 정의에 속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불의는 친구들 사이를 일컫는 것입니다’.
‘ 좋다. 그럼 장군이 사기를 잃은 군사들을 위해 곧 지원군이 온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겠느냐 ? 덕분에 열세에 놓였던 아군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말이다. 이것이 무엇이냐 ?’.
‘ 당연히 정의입니다’.
‘ 정신병에 걸린 남자가 있다. 친구는 남자가 자살할 것이 두려워 그의 집에서 칼을 비롯한 예리한 물건들을 모두 훔쳤다. 이 친구의 도둑질은 정의인가 ?’.
‘ 그렇습니다. 그 친구의 행위는 분명 정의입니다’.
‘ 너는 친구 사이에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
‘ 그 말을 취소해도 되겠습니까?’.

 이 스승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다. 그는 아테네 시장에서 연설하고 함께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선 채로 사고하는 독특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한 번 생각에 빠지면 먹고 자는 것도 잊었으며, 옆에서 누가 불러도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보였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나 토론을 할 때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다른 학자들처럼 자신의 학식이 풍부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며 질문을 통해 가르침을 받기를 청했다.
 하지만 일단 답을 시작하면 반박을 통해 상대방의 논리적 모순을 잡아내어 상대방이 결국 소크라테스의 관점을 말하도록 이끌어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관점이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각자의 영혼에서 나온 것이며 단지 육체의 방해를 받아 그 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단지 아이를 받아주는 산파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모른 체하는 이 세태라면 옆에 있어준다는 일이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거나 입소문만 무성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단 구경꾼으로 옆에 있게 된 이상 도움은 못 될지언정 불편하고 불안함을 끼쳐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게 될 경우 남의 일에는 될 수 있는 한 간여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그 간여가 상대방에게 진정한 도움이 될 때 그런 도움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앞장 설 일이 된다.
 나와 무관해 보이는 일로 보이는 일이 옆에서 일어날 때 그 일에 최소한 방해가 안 되어야 함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할 일이라는 말이 된다. 개인적인 일에도 도움이 되어야 할 일이지만 공익과 관계될 때 더더욱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현대사회가 처한 사회 경제적 드러나고 있는 계층  간의 갈등으로 인한 옆 사람들의 박탈감 조장, 그리고 종교적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분열과 대립은 옆에 서 있게 된 사람으로서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는 좋은 반면교사로서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곧 나의 고통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작은 고통이 몇 배로 불어난 우리 사회 모두의 기쁨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될 때 무엇이 우리를 막으랴 싶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