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이미 반복하여 거듭 거듭 밝혔듯이 기원 전 7197년에 지구상 최조의 나라이자 우리 조상의 나라인 환인 천제님의 환국(桓國 3,301년간)에 이어 18세에 이르는 환웅이 다스리는 배달국(倍達國 1,565년간)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때에 지금의 중국 땅에서는 이른 바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복희(伏犧), 신농(神農), 헌원(軒轅)의 삼황(三皇)이 나타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삼황의 자손인 오제(五帝)가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태초의 역사란 전승된 전설과 신화로 포장되어 있게 마련인데 이 소중한 자료들을 어떻게 대하며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따라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신화의 형식으로 전해진 이야기와 껍데기 속에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신화와 종교로 덮인 포장 안에서 그 기록의 재료가 된 사실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다.
 기원 전 3898년 거발환(居發桓) 환웅이 개국한 다음 5세로 이어지는 태우의(太虞儀) 환웅에게 12명의 왕자가 있었으니 그 막내아들이 태호복희(太嘷伏犧)다. 우리의 사서(史書)가 아닌 현재 중국의 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찬한 사서인 고사변(古史辨)이 말한다. ‘동이(東夷)는 은(殷) 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태호, 제준, 제곡, 소호, 제순 그리고 설(契)이 같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듯 명확한 사실이다’. 태호 복희는 이처럼 우리 배달국의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배달국의 우사(雨師)라는 관직에 있다가 청구(靑丘)와 낙랑(樂浪)을 거쳐 진(陳)으로 옮겨 갔다. 그의 후예들이 풍산(風山)에 나뉘어 살았으므로 풍(風)씨를 성으로 삼았다. 배달국 수도인 신시(神市)로부터 나온 복희는 신룡(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掛圖)를 만들고 신시의 역법을 고쳤다. 복희가 배달국 우사로 있을 때 역(易 또는 桓易)을 만들었고 후대에 오면서 이를 ‘복희 팔괘’라고 부르게 되었다. 결국 동양의 음양오행설은 환단(桓檀)의 문화에서 나온 것이니, 이는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전수한 세 개의 천부인(天符印). 즉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이 그것이다. 중국의 사학자 서량지(徐亮之)는 말한다. ‘역법(易法)은 동이(東夷)가 창시지이며 소호(小嘷)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태호 복희 출현 이후 기원 전 3240년 즉위한 8세 안부련(安夫連)환웅 때 배달국의 중요 성씨의 하나인 웅씨(雄氏)에게서 갈라진 소전(小典)이라는 사람이 있다. 지금 중국 섬서 성 기산(岐山縣)에 있는 기수(岐山)를 일컫는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던 소전의 아들인 신농(神農)은 여러 가지 풀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신농은 소호 금천씨와 함께 고시씨(高矢氏)의 자손이니 고시씨는 대대로 배달국에서 우가(牛加)의 직책에 있으면서 농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지금의 농림부(農水産食品部)인 우가 고시(高矢)의 덕분에 밥을 굶지 않게 되었다는 감사의 뜻은 지금도 전승되어 ‘고시례’라는 농민들의 새참 먹기 전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외치는 주문이 그 화석임을 전해준다. 신농이 중국에서 농사의 시조로 불리는 것은 바로 우리의 배달국 우가 고시의 농사법 내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당시의 미개한 중화인들을 깨우친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신농의 상을 만들 때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 환웅이 다스리던 배달국 우가(牛加)출신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 고대 신화는 이렇게 말한다. ‘신농이 백성들에게 오곡을 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수많은 곡식의 종자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이 종자들을 주워서 밭을 갈고 심었는데 그 때부터 인간들은 오곡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염제 신농은 배달국에서 태어난 뒤 중원의 남방으로 진출하여 그 곳에서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농사의 기술이나 종자는 배달국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신화에서는 하늘에서 수많은 곡식이 떨어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또 중국 신화는 말한다. ‘태양의 신이며 농업의 신이기도 한 염제 신농이 처음 태어났을 때 주위의 땅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아홉 개의 우물만이 그를 반겨주었다. 아홉 개의 우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만일 어느 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면 나머지 여덟 개의 물도 함께 출렁거렸다.’여기서 아홉 개의 우물(九井)이란 구환(九桓), 구이(九夷), 즉 우리 동이(東夷)를 의미한다. 옛 부터 북방계열로 분류되는 우리민족은 음양오행에서 북방을 의미하는 것이 물(水)이고 이 물에서 만물이 생성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 하늘을 양(陽)인 아버지에, 땅과 물은 음(陰)인 어머니에 비유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물의 상징인 하백의 딸이고 단군왕검의 황후 역시 하백의 딸이다. 이처럼 우물은 동이족을 상징하는 사물의 하나이며, 구정(九井) 역시 같은 뜻이 된다. 신화에서는 아홉 개의 우물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했으니 이는 구이 중에서 어는 한 종족이 침략을 받으면 동이족 전부가 일어나 그 침입자를 응징하는 전통을 말해 준다.

 그 이후 배달국의 14세 치우(蚩尤 기원 전 2692년)환웅 시대에 중원 땅에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출현하였으니 그 또한 중국이 말하는 삼황 중 한 인물이다. 앞서 본 우리 배달국 고시(高矢)계에서 갈라진 소전(小典)의 지파에서 일부가 가축이나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로 유배 간 공손(公孫)이라는 성씨의 지파가 있었다. 헌원은 이 지파의 인물이니 소전의 자손이다. 치우환웅 때에 중원의 수많은 제후국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환웅이 정벌에 나서 이들을 모두 복속시키면서 이 중 하나인 공손헌원과 10년에 걸쳐 73 차례에 걸친 싸움 끝에 헌원을 사로잡아 그를 죽이는 대신 중화인들을 다스리는 제후국 왕으로 봉한 뒤, 헌원이 죽은 후에도 80년간 더 통치하다가 다음 15세 치액특(蚩額特) 환웅 시대로 넘어갔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헌원이 치우를 탁록 전투에서 이겨 잡아 죽였다는 엉터리 기사를 적었는데 이는 그들의 간절한 희망사항을 표현한 것으로, 탁록 전투에서 ‘치우비’라는 부장급 장수 하나가 잡혀 죽은 것을 과장되게 기록한 데서 이다. 여러 번 싸움에서 번번이 패한 헌원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 다녔으며, 또 언제 추격해 올지 모르는 배달국 군사들 때문에 막사 밖에는 늘 보초를 세워 두어야 했던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치우 환웅은 중국대륙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질 만큼 사후에도 그 위용을 떨쳤다. 어쨌든 이 싸움 역시 우리 동이족끼리의 싸움에 불과하다.
 우리의 기록 역사는 이처럼 일만 년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국은 기껏 4,000에서 5,000년 정도로 잡고 있다. 더 이상 올라갔다가는 우리 동이(東夷)의 역사에 흡수되지 않을 수 없고 보니 올려 잡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사정이다. 어느 때인가는 황제 헌원만이 그들의 조상이라느니, 태호 복희를 포함해야 한다느니, 염제 신농을 넣는다느니 하다가 근래에는 치우환웅 까지를 자기네들 조상으로 우기다가. 그것만으로도 성이 안 차자 이번에는 단군과 헌원의 자손들이 세운 고구려, 발해의 역사마저 자기네들 역사라고 우겨대는 모습에 아무런 대꾸 없는 우리의 한심한 모습, 우리 스스로가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짓밟고 그 역사에 휩쓸려 가고만 있는 이 참담한 모습을 왜 나 혼자 만 통분해야 하는지 전 대한민국 국민에게 외치고 또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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