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지적 존재로서 인간은 신이 설정한 이 법칙을 끊임없이 위배할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정한 법칙도 쉴 사이 없이 변경한다. 그래도 살아가야 하고 그래서 살기 위한 행동의 방침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인간은 오류와 무지를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그가 획득한 빈약한 지식조차도 다시 잃어버리곤 한다. 게다가 감성을 지닌 피조물로서 인간은 항상 무수한 정념과 정욕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매순간 자기 자신을 망각할 수 있고, 또 그래서 도덕에 근거한 법에 의해 인간을 각성시켜 왔던 것이다. 법이란 없을 때 보다 있을 때 편리하고 좋아야 한다. 법률의 해석에 있어서는 법률 자체의 문맥 자구 보다는 입법자가 지향하려는 정신을 읽어야 할 일이다. 또 법규는 느슨하거나 오히려 그 법이 없을수록 좋고 그 집행에 있어서는 엄격할수록 좋다. 우리의 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8조 법금과 같은 소박한 법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최초의 법이겠지만, 인구가 늘고 사회가 복잡해진 오늘 까지 그대로일 수 없으니 수 없이 많은 법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해 오고 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가장 근세사인 조선의 법이 어떻게 생겨나고 시행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될 것 같다. 
조선의 제 3대 왕인 태종 때에 하 륜과 이 직이 편찬한 ‘속육전’을 다음 대인 세종 때에 검토해 보니 미흡한 점이 많고 법령이 추가되어 보충할 곳이 생겨나자 세종은 황희에게 명하여 ‘경제속육전’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 책이 훗날 조선 법전의 대명사인 ‘경국대전’이 나오기 까지 조선 법치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근본적으로 법에 대한 세종의 생각은 애민이었다. 세종은 신하들의 허물을 여러 차례 덮어주었고 사형 받을 죄수도 죽이지 않고 살릴 수 있도록 용서할 이유를 찾곤 했다. 세종은 감옥의 환경에도 관심을 가지고 환경은 개선하도록 명하여 감방을 높여 공기가 잘 통하게 하고 차양 시설을 하게 했으며, 겨울에는 감옥을 따뜻하게 만들도록 했다. 또 지방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법을 집행할 것을 우려하여 임명장을 수여할 때 모든 수령들에게 반드시 법에 따라서만 처리하도록 간곡하고도 엄격하게 타이르고 명하였다. 살인 혐의자가 허술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무고한 죽음을 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 세종 22년 법 의학서인 ‘신주무원록’이 편찬되었다. 이처럼 세종은 법치보다는 덕치를 추구하는 전형적 유가의 통치자였다.
 조선조 19대 왕 숙종은 매우 영민했으나 병약한 편이었다, 그는 왕에 대한 자의식이 대단했고 재위 45년이 넘는 기간 중 수많은 당쟁을 겪는 가운데도, 상당히 현명하게 대처했다. 인현왕후의 등장과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의 정변을 겪는 가운데 요령 있게 주도 세력들을 꺾어서 결과적으로 왕권을 매우 강화시켜 놓았다. 숙종과 법체계와 관련하여 특기할만한 업적으로는 ‘오가작통법이 있다. 숙종 때에 처음 만들어진 법은 아니고 조선 초에 실시되어 오던 향촌 정책인 오가작통법이 이 때 강화된 것이다. 오가작통법이란 양반을 제외한 평민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 역모, 강도, 절도 등을 고발하게 하는 제도이다. 만약 역모, 강도, 절토가 같은 통에서 나오거나 은닉해 주는 경우에는 변방으로 강제이주 당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제도이니 북한이 따르고 있는 방식과 같다. 이 제도를 통하여 역모, 강도, 고발 외에도 호구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고 부역과 조세 업무에 능률을 기할 수 있었다. 백성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갈 때에는 이사 사유와 이사 갈 곳을 적어서 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니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 된 것이다. 또 이 오가작통법이 후에 부실한 족보를 꿰맞추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 오가작통법은 조선에서 창안한 법이 아니라 조선의 건국보다 2,000년 정도 앞선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라에 재상으로 있던 상앙이 입안한 법이고, 이를 토대로 후일 진시황이 국력을 길러 천하통일을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전국시대의 상앙은 원래 위(魏) 나라의 서공자(庶公子)였다. 그는 위나라에서 헌책을 올리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자 진(秦) 나하 효공에게로 갔다. 처음 그는 효공에게 제왕으로서의 길을 설명했으나 도무지 안 먹혀들자 이번에는 강국이 되는 방법을 강변했다. 그것으로  효공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게 되자 그로부터 상앙은 크게 중용되었다. 효공은 강국 책을 실행에 옮기는 첫 사업으로 우선 국정의 발본개혁을 단행하려 했으나 여론의 비난이 무서워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자 상앙이 말했다. ‘성공도 명예도 자신이 없으면 얻을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 그리고 행위든 사상이든 세상의 상례를 벗어나면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자(智者)는 시작하기 전부터 정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성에게는 계획 단계에서부터 알리지 말고 결과만을 누리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상(至上)의 덕을 논하는 자는 세속에 영합하지 않으며 큰 공을 세우려는 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상담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히 말씀 드리자면 강국을 목표로 하신다면 선례를 따르지 마시고 단행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종래의 관습에 따를 필요 없습니다.’ 효공의 여러 다른 신하들이 강력한 반론을 제기했으니 효공의 마음은 굳어지면서 상앙을 좌서장(左庶長)으로 발탁하고 국정의 개혁을 명하자 상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개혁을 단행했다. 오인조(五人組). 십인조(十人組) 제도를 설치하여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는 조마다의 연좌제를 설치한다. 타인의 범죄를 알고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한다. 그리고 고발한 자에게는 적의 목을 잘라 온 것과 같은 상을 주며 죄인을 은닉한 자에게는 적에게 항복한 것과 같은 벌을 준다. 한 집에 두 사람 이상의 성년 남자가 있으면서 분가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세금을 두 배로 받는다. 군공(軍功)을 세운 자에게는 그 경중에 따라서 상당한 급수의 작위를 준다. 개인적인 싸움에는 정도에 따라서 형을 가한다. 어른이나 아이나 힘을 합쳐 농경과 직물(織物)을 그 본업으로 삼도록 한다. 그리하여 곡식과 물건을 많이 상납하는 자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준다. 그 이외의 직업에 종사하고 싶어 하는 자나 나태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노예로 삼는다. 공족일지라도 군공을 세우지 못하는 자는 심사를 하여 공족의 신분을 박탈한다. 신분의 봉록을 정하여 확실히 차별을 둔다. 전지(田地), 가옥의 넓이, 가신, 노비의 수, 의복 등은 가격(家格)에 따라 단계를 정한다. 공적을 올린 자에게는 사치를 허용하지난 부자일지라도 공적이 없으면 호화로운 생활을 허용치 않는다 등이다. 상앙의 개혁안에 주안을 둔 것은 씨족 제도의 타도에 있었다.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봉건 영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고 관료화 하는 한 편 피 지배 계급에 대해서는 촌락 공동체의 울타리를 허물고 소가족을 무수히 만들어 개인을 단위로 납세, 군역(軍役), 순법(順法)의 체계를 만들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법이 선포되어 시행되자 불평불만을 호소하는 자가 일 년 동안에 수천 명에 달했다. 이럴 때에 공교롭게도 태자가 법을 어겼다. 상앙은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이 새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윗사람이 그것을 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자를 법에 의하여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태자는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사람이며 따라서 태자 본인을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태자의 시종장을 처벌하고 태자의 교육을 맡은 공손가를 입묵(入墨)의 형에 처했다. 그 다음날부터 모두 새 법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십년 후, 진나라에서는 길에 물건이 덜어져 있어도 아무도 주우려 하지 않았다. 산 속에는 도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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