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 조상이 세운 고대국가인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북부여를 합한 고조선에 이어 이 땅에는 우리가 아는 이른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시대가 수 백 년 있었던 것으로 배우고 있다. 틀린 것은 아니나 우리가 한 가지 주요한 것을 빼놓고 있으니 이 삼국시대의 중요 기간 중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거의 500년이나 존속했던 가야에 대하여 슬쩍 넘어가 버리거나, 또는 혹 다루더라도 너무 간단히 그런 나라가 잠시 있다가 없어진 것처럼 별로 비중 없이 다루는 게 현실이다. 이는 우리 교과서가 주로 일정시대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던 그 잔재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데 근본 원인을 돌려야 하겠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는 우리 고대사가 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그 근간으로 하는 데서 오는 병폐이기도 하다. 삼국사기가 안고 있는 주요 맹점 중 하나가 우리 조상이 세운 나라를 한반도에 국한 시키거나 기껏해야 삼국시대에 고구려 땅이 만주 벌판이었음을 명시할 정도에 그치고, 신라 통일 이후에는 통일 신라와 동 시대에 존속했던 발해를 역사에서 빼어 버리고 우리 역사를 축소시켜 반도에 가두어 놓았다. 뿐만이 아니다. 지금 중국의 인구 80% 이상이 살고 있는 중국의 전체 해안지역이라 할 수 있는 지역 전부를 장악하고 있던 고조선(단군조선과 북부여)이 망하고, 이를 계승한 삼국시대에는 고조선 영토를 완전히 수복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요동반도 이북 지역은 고구려가, 그 남쪽 산동 반도에서 그 이남의 해안에 걸친 백제가 장악하고 있던 땅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의 사료(史料)들이 버젓이 조선 영토임을 증언하고 있는데도 유독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누락시켜버렸다는 점이다.
 삼국시대의 상황을 조금만 더 개관하자면 단군조선 시대에 지금 중국의 해안에 살던 고조선 유민들이 중심이 되어 춘추 전국시대의 오(吳 나라, 월(越) 나라 등지에는 내륙에 있던 위(魏) 나라 등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이 ‘위(魏)’ 와는 소리(音價)나 의미가 비슷한 ‘왜(倭)’ 라는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니 해양족인 이들이 나중 한반도 백제와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의 일본 종족의 주류를 이루는 집단이기도 하다. 이들은 백제와 왜, 나아가 가야까지 따로 구분할 수 없는 집단인 것이다. 전성시대의 백제는 지금의 중국 해안, 한반도의 서 . 남해 해안, 일본의 대부분의 땅이라는 세 곳에 영토를 가진 강대한 세력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 정도의 배경 하에서 가야를 보면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본(금관) 가야를 세운 이후 490년 후인 서기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사실상 김수로왕의 건국은 당시 오월(吳越) 지역이었다가 그 후예들이 지금의 경남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이 배경에서는 옳은 것이며, 이 가야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돕기 위해 5만의 지원군을 보내기 전 까지는 신라나 백제에 뒤지지 않는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준다. 신라와 가야의 첫 전투는 신라 탈해왕 21년 낙동강 유역인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벌어져 가야가 승리했으며, 신라 지마왕 때에도 두 번이나 신라군 1만 명을 가야가 물리친 일이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10년 대가야, 아라가야, 백제, 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다급한 신라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 지원병 5만이 이들 연합군의 격파하고 섬멸하였다. 왜(倭)의 참전이 약간의 주목을 끌지만 이들은 모든 문화, 특히 철기문화에 훨씬 앞서 있던 가야의 철기들을 구하고자 왜국 특산물을 바치기도 하였으나 주로 노역으로 때우는 용병들이 가야에 머물고 있다가 전투에 참가한 소수의 지원병일 뿐이다. 철갑으로 무장한 가야의 기마전단이 신라를 공격했고 여기에 소수의 왜병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연합군은 신라 성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도 삼국사기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내물왕 45년 ‘왕이 길들이는 내구의 말이 무릎을 꿇고 슬프게 울었다’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슬쩍 넘어가고 만 것이다. 이 전투에서 가야가 망한 것은 아니지만 존립 기반이 흔들릴 정도의 큰 타격을 입었다. 그 후 진흥왕 15년 관산성에서 가야와 신라 간에 또 한 번의 큰 전투가 벌어져 피아 수만 명에 이르는 인명 손실이 있었다. 이미 주력 기마병이 심대한 타격을 입은 가야군은 결국 신라에 패퇴하여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고구려군의 승리가 가야의 몰락을 앞당기게 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가야는 신라를 능가하는 철제갑옷에 기마군단을 갖춘 강국임을 보여준다. 당시 철제품을 만드는 재료는 두 가지가 철광석과 숯이다. 철광석은 보통 1,500도라야 녹지만 숯을 섞으면 1,300도에서도 녹는다. 온도가 올라간 제련로에 철광석을 넣고 다시 숯과 함께 가열하는 것이다. 제련 과정을 거친 괴련철에는 아직 불순물이 들어있다. 괴련철을 다시 불에 달구고 두드리는 반복된 과정에서 불순물은 빠져 나가고 단단한 철만 남게 된다. 이 가야의 철 다루는 기법이 5세기 이후 일본에 전수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일본에는 철 수입을 장악하는 것이 힘을 키워 나가는 데 중요했다. 특히 긴키(近畿) 정권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기타큐슈 지역을 장악하고 철 수입로를 확보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가야시대의 김해는 평야가 아니라 수심 5m 내외의 만이었다. 김해는 천혜의 요건을 갖춘 국제무역항이기도 했다. 가야에서 출토된 배 모양 토기는 당시 여기서 견고한 배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야 초기 외적 석탈해를 추격하여 500척의 군선이 발진하기도 했다. 가야가 일찍부터 대규모 선단과 이를 운용할 항해술을 보유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가야는 철 생산력 뿐 아니라 그 분배권까지 장악하면서 3-4세기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앞서가는 세력으로 떠올랐고, 가야는 철 거래를 통해 경제력을 축적하고 이 철 기술을 바탕으로 다량의 철제 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서기 48년 구간 등의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조알할 때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 가장 예쁜 사람을 입궁시켜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은 ‘내가 여기 온 것은 천명이요 내가 배우자를 찾는 것도 천명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하면서 유천간에게 명하여 좋은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여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에 가게 했다. 갑자기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단배가 장서기를 훗날리며 북쪽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섬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내려 뛰어왔다. 왕이 배에서 내린 허 왕후를 위해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가 왕을 배알하고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인데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모후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황천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낸 큰 보물로 신성한 분이다.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서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하늘로 올라 가셨으니 공주는 그 곳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왕이 ’짐은 나면서 성스러워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 이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게 매우 다행한 일이오‘ 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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