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구한 말 고종황제 시절, 일본 구마모도 출신의 낭인들이 왕궁을 덮쳐 일국의 황후를 살해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다. 외국인들이 궁으로 난입하여 무자비한 잔학 행위를 저지른 일은 세계 어느 역사에도 없는 인간의 탈을 쓰고는 있을 수 없는 극악무도한 만행이다. 궁에 난입한 낭인들은 황후를 찾아내어 옷을 벗기고는 일본도로 잔인하게 살해하고 증거인멸을 위하여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태웠다. 연약한 여자를 수 십 명이 달려들어 살해한 것을 마치 무슨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살해에 사용하였던 일본도를 무슨 보도(寶刀)마냥 규슈의 어느 신사(神社)에 지금까지도 보관하고 있다니 참으로 분노를 삭일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일정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의 왕이나 왕비를 죽였다면 씨를 말리려 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왕자가 러.일 전쟁 전 일본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 때 한 일본인 괴한이 휘두른 칼에 황태자가 조금 다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일본 당국은 범인에게 즉각 사형선고를 내리고 천황 이하 온 조정과 전 일본 국민들이 러시아에 사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대국인 러시아가 전쟁이라도 벌이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였던 것이다. 그러나 약소국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범인들에 대한 재판은 유야무야 시간만 보내고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살인범들은 모두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며 호강하고 살다가 제명대로 죽었다.

 이제 1920년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에서 태어나 일본군에게 끌려간 정옥선 할머니의 이야기 차례다. 열 세 살 되던 어느 날, 나는 밭에서 일하는 부모님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물을 길으러 마을의 우물가로 갔다. 그 때 일본군이 트럭을 몰고 나타났다. 일본군은 나를 붙잡아서 막무가내로 트럭에 실었다. 나는 그 길로 경찰서로 끌려가 경찰관 여러 명에게 강간을 당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내 입에다 양말을 틀어넣고 번갈아가며 나를 계속 강간했다. 나는 울었다. 경찰 우두머리가 내 왼쪽 눈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그 날 나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열흘쯤 지나서 혜산시의 일본 주둔군 막사로 끌려갔다. 그 곳에는 약 사 백 명의 내 또래 조선 소녀들이 있었다. 우리는 오천 명이나 되는 일본군의 성 노예로 혼자서 하루에 사십 명에 달하는 남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반항을 해 보았지만 그들은 나를 때리거나 내 입속에 넝마 조각을 틀어넣고 억지로 강간을 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한번은 나와 함께 있던 한 조선 소녀가 왜 우리가 그토록 많은 남자들을 받아야 하느냐고 항의를 했다. 이에 일본군 중대장인 야마모토가 부하에게 그녀를 칼로 두들겨 패라고 명령을 했다.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옷이 벗겨지고 팔과 다리가 묶인 채 못이 박힌 판 위에 뉘어졌다. 그들은 그녀를 못 판 위에다 굴렸다. 살점들이 찢겨져 나가고 피가 판을 흥건하게 물들였다. 마침내 그들은 그녀의 목을 잘랐다. 또 다른 야마모토라는 일본인은 ‘너희들을 죽이는 것은 개를 죽이는 것 보다 더 쉽다’ 고 말했다. 또 ‘저 조선 년들이 못 먹어서 울고 있으니 죽은 사람의 살을 끓여서 먹게 하라’ 고 했다. 또 한 번은 우리들 중 사십 명을 트럭에 태우더니 멀리 뱀이 차 있는 웅덩이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소녀들 몇 명을 때리고 물속으로 밀어 넣고는 흙으로 덮어서 산 채로 매장을 했다.

 이것이 오늘의 일본인들이 강제성이 없었다고 발뺌하는 위안부 동원의 실상이다. 그들이 이 땅의 여자들을 끌고 갈 때 피복 공장이나 무기 공장 같은 시설에 취직시켜 준다는 감언이설로 끌고 가서는 그 길이 곧 위안부의 길이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인간사냥에 나서 닥치는 대로 잡아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딸들을 조혼시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들 특유의 발뺌 작전, 문제 희석 작전은 늘 그대로다. 이처럼 아직도 많은 산 증인들이 있는 데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뻔뻔스러운 일본인은 군 위안부로 끌려 간 한국 여자, 대만 여자, 네델랜드 여자, 중국 여자들이 군 위안부 생활을 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주장까지 한다. 세계의 어느 군대가 전쟁터에 그들의 성욕을 해소할 여자들을 끌고 다닌 일이 있었는가. 중국에서 일본군들의 강간사건이 하도 빈발하여 전투에 지장을 주니 이를 해소할 방안으로 내 놓은 것이 위안부 제도인 것이다. 위안부로 끌려가 돈을 벌기는커녕 병신이 되거나 살아서 돌아 온 것만 해도 다행인 셈이다.
 옛날 일본이 먹고살기 힘들었을 때 수많은 일본 여자들이 외제에 나가서 몸을 판돈을 집에 부치곤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적어도 한국의 부모라면 굶어 죽을지언정 그 따위 짓은 안 시킨다.

 일본은 이제라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일본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망쳐버린 청춘에 대해서 진정한 사과와 함께 충분한 보상으로 위로해 주어야 마땅할 일이다.
 참으로 몹쓸 고난이지만 이런 고난들이 헛된 일로 지나가 버린다면 참으로 허망하고 애달픈 일이다. 그래도 이런 고난을 있음으로써 넓고도 깊은 우주(하느님)의 진리를 심도 있게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혼을 진공으로 만들어  버릴만한 깨질 듯 한 고통의 삶을, 숨통을 무덥게 하는 충격적인 슬픔과 한숨소리가 마음의 스승이 되어주는 만신창이의 인생길을 걸어본 자만이 우주 대도의 법광(法光)의 충만을 엿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밑천으로 하여 지락(至樂)으로 바꾸어 준다.
 더 이상 우리의 혼을 뺏기고 사고방식마저 우리의 것이 사라진 자리에 외래방식이 자리잡아가는 이런 상황이 계속 된다면 우리의 설 자리는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피와 정기(精氣)가 흐르고 있는 본래의 정신세계로 되돌아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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